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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분 국사(國史) 강의 8강-윤관 9성은 현 하북성 장가구시

arang 2519 2018. 2. 20. 00:28



1분 국사(國史) 강의 8강


-윤관 9성은 현 하북성 장가구시



『고려사』에 따르면, 1107년 12월 15일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공격하여 대파시키고, 국경선으로서 지계(地界)를 정하고, 웅주(州)·영주(州)·복주(州)·길주(州) 등 4개성(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사』 윤관(尹瓘) 열전에 따르면, 영주(州)성은 몽나골령(蒙羅骨嶺) 아래 950간으로 지었으며, 웅주(州)성은 화곳산(火串山) 아래 992간, 복주(州)성은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 길주(州)성은 궁한리촌(弓漢伊村)에 670간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또 1108년에는 함주(咸州)공험진(公險鎭)에 성을 쌓고, 공험진(公險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 윤관이 모두 9개 성을 쌓았는데,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주(咸州)를 진동군(鎭東軍)이라 부르고 1만 3천호를 두었으며, 영주(州)를 안령군(安嶺軍)이라 부르고 웅주(州)를 영해군(寧海軍)이라고 불렀는데, 각각 1만호를 두었다고 합니다.

··의(··宜) 등 3개 주()에는 각각 7,000호를 두었으며, 공험(公險)·통태(通泰)·평융(平戎) 등 3개 진(鎭)에는 각각 5,000호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지명들은 도대체 어디겠습니까?

즉,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윤관(尹瓘)이 1107~1108년에 모두 9개 성을 쌓았는데, 함주(咸州)·웅주(州)·영주(州)·복주(州)·길주(州)·의주()·공험(公險)·통태(通泰)·평융(平戎) 등 9개 지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1109년에 여진이 화친을 요청해 와서 길주(吉州) 등 9개 성을 돌려줬는데, 길주(吉州)·숭령(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영주(英州)·복주(福州)·함주(咸州)·웅주(州)·선화진(宣化鎭) 등 9개 였다고 합니다.

즉, 윤관(尹瓘)이 쌓은 9개 성(또는 진)의 지명들과 여진에 돌려준 지명들을 비교해 보면, 의주(州)·공험(公險)·평융(平戎) 등 3개가 빠지고, 숭령(崇寧진양(眞陽)·선화진(宣化鎭) 등 3개가 추가되었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윤관(尹瓘)이 쌓은 9개 성(또는 진)의 지명들과 여진에 돌려준 지명들이 서로 차이가 있는데,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의주(州)는 나중에 성을 쌓았으며 남쪽에 있었으므로 여진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에서 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 4개 방어군(防禦郡)과 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숭령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선화진(宣化鎭)6개 진(鎭)을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윤관(尹瓘)이 쌓은 9개 성의 지명들과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가 관리했다는 지명들을 비교해 보면 서로 차이가 있는데, 함주(咸州)·의주(州)가 빠지고 숭령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선화진(宣化鎭) 등이 추가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가 관리했다는 지명으로서 여진에게 돌려준 성 중에 선화진(宣化鎭)이 있는데, '선화(宣化)'라는 지명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장가구시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림 1]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구의 위치


혹자는 '선화(宣化)'라는 지명 하나 가지고 윤관이 9성을 쌓은 함주부(咸州府)라고 볼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관이 9성을 쌓은 함주부(咸州府)를 이미 먼저 찾은 후, 유적을 찾으려고 현재의 장가구시 주변의 지도를 관찰하다가 '선화(宣化)'라는 지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윤관 9성이라고 불리는 함주부(咸州府)를 찾게 된 논리는 아래와 같습니다.다.    

고려 왕경(王京, 평양, 낙랑)의 위치와 서여진(흑수말갈, 백산말갈 등)이 건국한 금(金)의 도읍지 상경(上京)의 위치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와 산서성 대동시로 각각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즉, 고려가 공격하여 점령한 함주부(咸州府)는 고려 왕경(王京, 평양, 낙랑)과 금(金) 상경(上京)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遼) 남경[南京, 연경(燕京), 연군성(燕郡城)]이 있었던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서 고구려 요동성(고려 서경)이 있었던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까지 500리였다고 합니다.

또  고구려 요동성(고려 서경)이 있었던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서 대진국(발해)상경이 있었던 현재의 북경시 창평구까지 1,500리였다고 합니다.

또 대진국(발해) 상경이 있었던 현재의 북경시 창평구에서 흑수말갈의 거주지, 즉, 금(金) 상경(上京)이 있었던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까지 1,000리였다고 합니다. 다만, 대진국(발해) 상경에서 북쪽으로 1,000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북쪽은 서쪽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즉, 요(遼) 남경[南京, 연경(燕京), 연군성(燕郡城)], 고려 서경(요동), 대진국(발해) 상경, 금(金) 상경(上京) 등의 위치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으므로, 고려의 북계 국경선 밖에 있는 현재의 하북성 장가구시 주변 일대를 윤관 9성, 즉, 함주부(咸州府)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요(遼) 남경(南京), 대진국(발해) 상경, 금(金) 상경(上京) 등의 위치를 찾게 된 논리는 1분 강의답게 차후에 순서대로 차차 설명하고자 합니다.








출처 : 동북아역사연구소
글쓴이 : 광화세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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