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은 신시(神市) 시대에 환웅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더 앞선 환인의 가르침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유래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천부경>은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이 백두산 인근에서 옛글자로 새겨진 비석을 발견하고 한자로 이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도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몇몇 야사의 기록에 전하는 것이다.
<천부경>의 저자와 기원, 유래에 대하여는 더 이상 밝힐 방도나 연구의 단서가 없고, 다만 과제로 남은 것은 이 경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천부경>은 아주 짧은 경으로 최치원이 한자로 옮겼다는 내용은 글자 수가 여든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문으로 읽어 뜻을 알 수 있는 구절도 있지만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숫자로 이루어진 구절들은 한 눈에 뜻이 잡히지 않는다. 이 숫자로 된 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그야말로 이론이 분분해서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 틀리고,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지금까지 천부경의 해석이라고 내놓은 책만도 수십 종이 넘고, 인터넷에 나도는 해석도 가히 수백 종에 달한다. 천부경을 선가수행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이도 있고, 하도와 낙서에서 기원을 구하는 이도 있고, 역과 오행에 끌어다 붙여 푸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해석도 논리의 비약이 심하고 각자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는 억지 이론이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논쟁거리도 못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천부경>의 의미를 <천부경>의 밖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자 81글자로 쓰여진 <천부경>의 원문에 담긴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으려고 하지 않고, <천부경>과 전혀 관계없는 동양의 신비로운 학설이나 추상적인 이론으로 풀려고 들었다는 것이다. <천부경>의 원문은 많은 부분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로 되어 있어서 원문은 읽을 수가 없다고 포기하고 숫자의 의미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려고 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천부경> 연구의 주된 흐름이었다.
때문에 천부경에 쓰여진 숫자들은 어떤 방법이나 이론으로 해석한다 해도 그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증명할 길이 없고, 또 해석에 동원한 다른 학설과 이론들부터가 증명되지 않은 학설들이기 때문에 '이미 참이라고 증명된 명제를 전제로 하여 증명한다'고 하는 논리의 틀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역이나, 하도, 낙서와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해석에 동원한 이론들부터 정설이 없고 논리적인 구조를 갖추지 못한 것이어서 그런 것들을 근거로 하여 해석한 <천부경>이 논리적인 방어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부경>에 대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천부경> 81글자가 자체적으로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면 가치 있는 고고학적 유물로서 <천부경> 당대의 해석이 발견되기 전에는 '해석 불가능한 암호문'으로 덮어놓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천부경>이 81글자 자체로는 아무 뜻도 읽어낼 수 없는 내용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천부경에 사용된 숫자들이 <천부경> 밖의 이론이나 학설과 결부해야만 의미가 살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자체적으로 해석 가능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가에 대해 먼저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먼저 내린다면 <천부경>은 읽을 수 없는 난해하고 신비로운 암호가 아니라 극히 평이한 문장이며 그 의미가 대단히 명료하다는 점이다. 다만 서술문으로 기술하게 되면 대단히 길어질 내용을 수자를 이용하여 극단적으로 압축하여 기술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문처럼 보인다는 것일 뿐 실제로는 아주 명료한 문장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천부경>의 해석에는 어떤 외부의 이론이나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상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천부경>을 가지고 이토록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안개 속을 더듬고 있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천부경>의 원문에 대한 해석은 이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 하면 <천부경>의 원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천부경>의 독법(讀法)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반박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외의 어떤 독법이 달리 나올 수가 없는 오직 하나의 독법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천부경 원문에 대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한다.
우선 천부경의 전문(全文)을 먼저 보자. .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析三極, 無盡本(석삼극 무진본)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一積十鉅, 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大三合六, 生七八九(대삼합육, 생칠팔구)
運三四成, 環五七(운삼사성, 환오칠)
一妙衍, 萬往萬來(일묘연, 만왕만래)
用變, 不動本(용변, 부동본)
本心本太陽, 昻明(본심본태양, 앙명)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첫 구절은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이라는 다섯 글자다. 첫 구절부터 숫자가 나오기 때문에 첫 발짝을 떼기도 전에 막혀버리게 된다. 물론 일(一)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미루어놓고 문장을 그대로 읽을 수는 있다. '1은 시작되었으나 시작되지 않은 1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1'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이 문장은 암호이다. 만약에 수사기관이 간첩들 간의 통신을 감청했는데 '1을 죽여라'라는 지시문이었다고 하자, 이때 '1이 누구라는 것을 모른다면 '1을 죽여라'라는 지시문은 정보로서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수사기관은 총력을 다해 지시문 속의 '1'이 누구인가를 알아내야 그 사람을 보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부경>의 해석은 과연 '1'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노력들이었다. 간첩의 통신문 속에 '1'이 누구라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면 수사관들은 통신문 외의 첩보에서 '1'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청한 통신문의 다음 구절에 '1'이 누군가가 지칭되어 있다면 수사관들이 '1'이 누군가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신문의 뒤 구절을 보지도 않고 첫 구절만 읽고 뛰어나가 '1'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헤매고 다닌다면 이건 코메디에 가깝다. <천부경>은 바로 다음 구절에 '1'이 무엇인지 바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부경>의 '1'이 무엇인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2'도 마찬가지고 '3'도 역시 그러하다.
<천부경>에 사용된 모든 숫자는 <천부경> 내에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명확하기 때문에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모든 <천부경> 해석자들은 숫자들의 지칭하는 바를 <천부경>이 말하는 그대로 읽지 않고 불필요할 뿐 아니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여러 학문과 신비론들에 결부시켜 억지춘향식의 해석을 해왔다는 것이다. 과연 <천부경>은 다음 구절에서 이 '1'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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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년전 우리 조상이 밝힌 우주의 실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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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벽운 이경숙이 전하는 천부경의 올바른 이해 "一始無始一, 천부경이 전하는 동양적 우주론의 핵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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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구절은 '析三極無盡本(석삼극무진본)'이다. 여기서도 숫자가 나온다. 바로 '3'이다. 이 구절의 '3'은 무언가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부사나 수사로 쓰였다. 즉 셋으로 나눈다는 구절이다. 전체적인 의미는 '극을 셋으로 나누어도 본은 다하지 않는다' 혹은 '3극을 나누어도 본은 다함이 없다'로 읽을 수 있다. 이 문장에서도 '3'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음 구절을 더 보자.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이다. 비로소 뜻이 명료한 문장이 나왔다. 이 문장의 해석은 어려울 게 없다. 그대로 읽으면 된다. 즉 하늘은 숫자로 표하면 '11'이고, 땅은 숫자로 표하면 '12'이고, 사람은 숫자로 나타내면 '13'이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이것 말고 다른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한 가지 번역뿐이다. '하늘은 일일(11)이요, 땅은 일이(12)요, 사람은 일삼(13)이다'라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우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수다. 11, 12, 13, 각각 하늘과 땅과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서 '1'은 세 가지에 모두 들어있는 공통수이다. 이 공통수를 빼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고유수가 1과 2와 3이 된다. 즉 <천부경>은 이 문장에서 앞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을 1과 2와 3이라는 수로 표현하겠노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천부경>의 숫자를 가지고 헤맬 이유가 없다. 1은 하늘이요, 2는 땅이요, 3은 사람을 가리키는 수다.
이걸 알고 나면 의미를 몰랐던 첫 구절이 풀어진다. '1'을 '하늘'로 읽으면 첫 구절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은 '하늘은 시작되었으나 시작되지 않았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 문장에서 하늘을 우주라는 말로 바꾸면 그야말로 현대 우주물리학의 결론이 된다. '우주는 존재하지만 시작은 없다.' 빅뱅을 우주의 시작으로 보는 우주물리학의 관점은 근래 들어 변하고 있다. 빅뱅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더 이상 생각지 않는다. 빅뱅조차 무엇인가 선행하는 것이 있다고 본다. 우리 우주 외에 공존하는 여러 우주가 있다는 가설이 갈수록 힘을 받고 있다. 때문에 이 우주는 본시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결론 외에 다른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적인 우주관이 수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경전에 이토록 소름끼치게 명료한 표현으로 담겨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첫 구절과 시종대구(始終對句)의 관계에 있는 마지막 구절을 같이 보면 뜻이 한층 명확해 진다. <천부경>의 마지막 구절은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이다.
따라서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은 '하늘, 즉 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고, 끝남이 없이 끝나니라'라는 우주에 대한 직관이다. 바로 '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요, 결론이고, 정의이다. 천부경의 이 여섯 글자가 바로 동양적 우주론의 핵심이고 골자임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시작이 없는 우주, 끝이 없는 우주. 이것이 1만년도 전에 우리 조상들이 밝혀 놓은 우주의 실체라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하는 유치한 서양의 우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훗날 불가(佛家)의 세계관이 여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천부경>의 첫 구절을 보면 누구나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불교의 모순적(矛盾的) 설명인 반어법(反語法)의 유래를 이에서 찾을 수 있음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이 되는 유명한 구절인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은 표현법인 것이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구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불교의 통찰과 '시작되지 않고 시작된 하늘, 끝나지도 않고 끝난 하늘'이란 천부경의 가르침은 의미뿐만 아니라 표현의 수사법적(修辭法的)인 기법까지도 쌍둥이처럼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반어법에 의하지 않고는 석가모니도 이 세계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광대무변한 우주가 한 알갱이의 티끌과 같다'는 말이나 '영겁의 세월이 찰나와 같다'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세계의 실상은 모순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그러한 모순의 토대 위에 서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환단시대의 우주관이 얼마나 무서운 통찰력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우주, 끝남이 없이 끝나는 우주'는 오늘날의 우주물리학이 내릴 수 있는 결론과 다르지 않다.
과학은 우주에 대해서 이것과 다른 어떤 결론도 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 이유로 꼽는 대폭발(빅뱅)도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폭발의 원인이 되는 우주 알의 이전(以前)이 가정되지 않고서는 빅뱅에 의한 우주의 탄생도 있을 수가 없고, 중력에 의한 우주의 최후도 모든 것의 최종적인 마지막, 최후의 최후는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이것은 현대 우주물리학의 결론임과 동시에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양적 우주관의 근본이었다.
다음 구절을 보자. '一積十鉅無櫃化三(일적십거무궤화삼)'이다. 여기서도 숫자가 두 개 나온다. '1'과 '3'이다. 뜻은 미루어놓고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면, '1을 열겹으로 쌓는데(포개거나 겹치는 것), 상자가 없어서 3으로 변한다'는 내용이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1'이라는 것을 열 번을 겹쳐 쌓았는데 그것(1)을 담을 상자가 없기 때문에 3으로 변해 버렸다는 소리다.
그런데 우리가 앞 구절에서 알게 된 '1'과 '3'의 의미를 대입하면 너무나 명료한 문장이 된다. 즉 '1' 대신에 하늘을, '3' 대신에 사람을 넣고 읽어보라. '하늘을 열 번 쌓아도 담을 상자가 없으므로 사람으로 화한다'는 소리다. 조금 풀어서 말하면 '사람은 하늘의 기운을 겹겹이 쌓고 다진 것이다'라는 말이다.
하늘의 기운이 변해서 사람으로 화했다는 <천부경>의 천인관이다.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이미 <천부경>에 담겨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다음 구절은 '天二三地二三人二三(천이삼지이삼인이삼)'이다. 지금까지 읽어온 방법대로 읽으면 '하늘의 수는 23이요, 땅의 수도 23이요, 사람의 수도 23이다'가 된다. 여기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대신하는 수가 전부 '23'으로 동일하다. 무슨 뜻일까? 먼저 나온 같은 구조의 문장인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과 나란히 놓고 보면 어렵지 않게 그 뜻이 잡힌다.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천지인 각각에 4개씩의 숫자가 쓰였다. 그것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천(天)에 사용된 수 : 일일이삼(一一二三) 땅(地)에 사용된 수 : 일이이삼(一二二三) 인(人)에 사용된 수 : 일이삼삼(一二三三)
천지인은 각각 자기 고유의 수(천=1, 지=2, 인=3)를 두개씩 가지고 있고 자기 외의 두 가지 수를 하나씩 갖고 있다. 천(天)을 예로 들면, 천의 고유수인 '1'이 두 개이고, 땅의 고유수인 '2'와 사람의 고유수인 '3'을 하나씩 갖고 있다. 지(地)는 땅의 고유수 '2'를 두 개, 하늘과 사람의 수인 '1'과 '3'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사람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고유수 '3'을 두 개, 천과 지의 고유수 '1'과 '2'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수로 표현된 위의 두 구절을 뜻으로 읽으면 이런 문장이 된다. "하늘, 땅, 사람은 고유수 '1', '2', '3'이 서로 다른 수이듯이 각각 달라 보인다. 그러나 기실에 있어서 천, 지, 인은 근본이 같은 것이다. 각자의 고유수를 두 개씩 가지고 있으면서 나머지 두 가지의 고유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늘은 하늘이면서 땅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땅은 땅이면서 하늘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늘과 땅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야 뜻이 통할 이야기를 <천부경>은 숫자를 사용해서 단지 12글자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장문의 설명도 사실 12개의 수를 이용한 <천부경>의 두 구절보다 적절한 표현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