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세상 읽기]
독립군 홍범도 장군, 극장 청소부로 초라한 죽음
2009/01/03
'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라는 부제가 붙은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고려인돕기운동의 자원봉사자로 2001년부터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재영·박정인 부부가 만난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들 부부가 만난 고려인 동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물이다.
단지 먹지 못해 팔과 다리가 구부러진 '서 와짐'과 '제냐'가 살고 있는 곳, 러시아 사람들에게 모종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아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는 '허 니나' 아주머니가 사는 곳.
병원한 번 못가보고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보아야했던 '김 아나스탸샤' 아주머니가 사는 곳, 윤간을 당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스물세 살 꽃다운 처녀 '엘레나'가 살아가는 절망의 땅 연해주의 이야기.
마음의 눈이 닫히지 않은 독자라면 표지 사진은 물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깊은 주름이 팬 고려인 동포들의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흑백 사진들 위로 "죽지못해 살아가는" 질기고 모진 목숨에 얽힌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1부, '고려인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가난과 이방인이 겪는 비통한 사연들이다. 정말이지 우리가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막힌 일들이 벌이지고 있었다.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 이주민들은 수도는 물론, 난방조차 되지 않은 오래된 군용막사에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오로지 맨몸으로 이겨내고 있다."
"봄이 되어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때도 기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일군다."(본문 중에서)
지은이 김재영의 이야기다. 그는 운명처럼 연해주 고려인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4년의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으며 이제는 그 땅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던 젊은 부부는 지마와 지나라는 이름의 고려인이 되고 만다. 마침내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고려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지마는 '드미뜨리'의 애칭이고 지나는 '지나이다'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온 '리 나리사'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연해주에는 지금도 1만여 명 정도의 고려인이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1863년부터 가난과 수탈을 피해 굶주림을 면하고자 농사를 지으러 간 이들이고,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피 흘리며 싸우던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다.
1920년대 항일무장 투쟁의 지도자 홍범도 장군, 이등박문을 죽이고 사형당한 안중근,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이상설, 이동녕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싸우던 이름 없는 독립군 병사들이 그들의 부모들이다.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극장 청소부로 살다 죽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홍범도 장군이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곳 극장의 청소부로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독립훈장을 받은 애국지사 최재형의 딸이 최 류드밀라 할머니의 "돌아갈 곳이 없어 (여기)이러고 산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조국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1937년 스탈린의 소주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연해주에 살던 18만여 명의 한인을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몰아넣었다. 강제 이주를 시작하기 전에 2500여명의 한인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강제 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 그리고 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묻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연해주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화물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일어나는 처참한 죽음의 기록과 중앙아시아 불모의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고단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씌어있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1988년 올림픽이 열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국에서 가난과 굶주림,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연해주로 '강제이주'했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55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독립국가의 자국민 우월정책에 떠밀려 또 다시 6000km나 떨어진 연해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연해주로 돌아온 이들은 러시아 국적이 없어 의료와 연금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취업도 할 수 없으며, 러시아인들의 부당한 폭력과 살인을 당하고도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필자는 2005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약 연해주에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갔었다면 그 때 만난 고려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이 책에는 지난 140년간 가장 골 깊은 수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러시아 재외동포인 '고려인'들에 관한 삶의 기록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이주의 역사가 1937년 스탈린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연해주 고려인들을 끌어안기 위하여 책을 쓴 김재영 박정인 부부는 처제와 함께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 다행인 것은 부족하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분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조국을 대신하여 참회와 공존의 삶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단체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조국에 살아가는 모두는 그들에게 진 빚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블로그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07.07.30
「한국의 역사 인물」66.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상승장군 홍범도(洪範圖)
●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다.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의병항쟁(義兵抗爭)과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이끌며 일제(日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던 맹장(猛將)으로 김좌진(金佐鎭), 지청천(池靑天)과 더불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3대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처럼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이 분명치 않고, 다만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1868년 평안도 자성(慈城)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평양 교외의 외성리(外城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또한 평안도 양덕(陽德)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쨌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부잣집에서 하인 노릇을 해야 했다. 스무 살이 된 1887년, 그는 평양 진위대(平壤鎭衛隊)의 병졸로 뽑혔지만 혹독한 차별과 굴욕을 견뎌내지 못하고 병영을 탈주하고 말았다. 원래 친척이 없던 그는 사람들 눈을 피해 함경도 산속의 허천강(虛川江) 강가에 있는 금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이렇게 광부로 몇 년을 일한 뒤 1891년에 처가가 있는 삼수(三水)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2년 뒤 그는 다시 생활 터전을 찾아 풍산군(豊山郡)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사냥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는 6척을 넘는 건장한 체구에 넓적한 얼굴은 수염에 덮여 있어 남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위엄 있는 풍모였다. 하지만 행동거지가 매우 공손하고 동료들을 친절히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번 작정한 일은 반드시 이루며, 부정한 일은 절대 허영하지 않는 강직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 무렵 산포수(山砲手)라 일컫던 사냥꾼들은 화승총(火繩銃)을 가지고 사냥을 하였다. 그는 날래고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서 총을 다루는 기술과 탄환 제조에도 정통하였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총기(銃器) 수리법과 탄환 제조법, 사냥법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며 항상 동료들의 생활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는 금세 동료들에게 떠밀려 포연(捕捐) 부대장으로 뽑혔고, 얼마 후 다시 포연 대장으로 추천되었다. 그 자리는 관리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길 수 있어서 모두들 노리는 자리였지만, 그는 관리에게 빌붙지 않고 항상 사냥꾼들의 이익을 위하여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동료 산포수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포연 대장이 된 직후인 1905년 11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한반도를 반식민지(半植民地)로 만드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모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애국자들이 대일의병항쟁(對日義兵抗爭)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격렬한 시류는 홍범도가 있는 사골인 풍산 일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관리 중에서도 관직을 팽개치고 항일전(抗日戰)에 참가하는 애국자가 있는가 하면, 일본 침략자들에 앞잡이로 매수되어 매국적인 행동을 하는 자도 있었다. 유달리 정의감이 강하고 애국심에 불타고 있던 홍범도가 동료 포수들과 함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선두에 서고자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 침략자들은 조선 민중의 무장력을 강제로 해제시키려고 1907년 9월 7일 '총포 및 화약류 취급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포수들이 소지한 화승총(火繩銃)을 모두 압수하려고 하였다. 사냥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는 포수들에게 화승총을 내놓으라는 것은 곧 '굶어 죽어라'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포수들은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일본 침략자들은 경찰과 헌병들을 동원하여 가차없이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일어서서 일본 침략자들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지키세." 포수들은 이렇게 결의하고 삼수, 갑산을 중심으로 일제히 항일(抗日)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 선두에 선 것이 홍범도였다. 포수들이 모여 구성된 의병부대였기 때문에 부대 명칭은 산포대(山砲隊)라 불리웠다. 홍범도(洪範圖)와 함께 궐기한 포수들의 대표자들은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송상봉(宋相鳳), 허근(許瑾) 등이었는데 주로 삼수, 갑산, 황수원, 풍산 등지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사수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사격술(射擊術)을 갖춘 포수들로써 일제(日帝)가 가장 두려워한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의병부대였다. ●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유격작전(遊擊作戰) 홍범도(洪範圖)를 중심으로 궐기한 산포대(山砲隊)는 1907년 11월 22일, 북청에서 풍산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로 후치령(厚峙嶺)에서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포수들의 총기(銃器)를 회수하기 위하여 파견된 일본군 2개 중대 병력은 산포대의 매복기습전(埋伏奇襲戰)에 말려들어 전멸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3일에는 일본군 북청 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가 경호하는 우편 마차를 갑산에서 혜산으로 향하는 중도에서 습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예기치 못한 패전(敗戰)에 당황한 일본군 북청 수비대는 11월 24일 미야베[宮部] 중대를 보내어 산포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적군의 우수한 화력(火力)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안 홍범도는 일단 부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척 하며, 요소 요소에 복병을 배치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전술로 바꾸어 도처에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12월 15일 갑산과 북청 중간에서 일본군 군수물자 수송부대를 습격하고 적군 호위병들을 모두 사살하고 막대한 군수물자를 빼앗아 일본군의 작전에 중대한 지장을 준 전투는 함경도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거듭되는 실패에 격노한 일본군 수뇌부는 함흥 수비대에서 기병 대대를 보충받아 대부대를 편성하고, 의병대토벌작전(義兵隊討伐作戰)에 나서서 교통의 요로인 중평장(仲坪場)으로 향하였다. 홍범도는 일본군 대부대를 교묘하게 유인하여 삼수의 산성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차도선(車道善)의 부대가 합류한 4백여명의 산포대(山砲隊) 대원들은 삼수성에서 일본군의 내습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산포대가 천연 요새라 할 수 있는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총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火力)만을 믿고 개인화기(個人火器)를 무턱대고 쏘아댔다. 하지만 전투가 무르익을수록 일본군의 피해만 커지고, 몇 시간 교전하는 동안 탄환까지 떨어지자 야밤을 틈타 혜산으로 도주하는 비참한 패전(敗戰)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패배로 위신을 잃은 일본군은 동북수비관구(東北守備管區) 사령관 마루이[丸井] 소장의 지휘 아래 다시 대군을 동원하여 삼수 공격에 나섰다. 이러한 적군의 동향을 일찌감치 탐지한 홍범도 장군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삼수를 떠났다. 그리고 소규모 부대를 시켜서 요충지인 중평장을 지키는 척하였다. 1월 9일 단숨에 중평장을 돌파한 일본군 대부대는 삼수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때 삼수성 안에는 이미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일본군은 막대한 포탄을 소모한 뒤에야 홍범도의 전략에 말려든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 순간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온 힘을 집중하여 탄환이 거의 떨어진 일본군 갑산 수비대를 급습하였다. 일본군 갑산 수비대는 허를 찔리고도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갑산 수비대는 아홉 시간에 걸친 총격전(銃擊戰) 끝에 전멸되고, 겨우 12명의 일본 군인만이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다. 홍범도의 부대는 일본군 병영은 물론이고 우편국을 비롯한 일본군의 군사 시설을 철저하게 파괴하고서 유유히 이리사(二里社) 방면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갑산 수비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일본군의 토벌대장 미키[三木] 소좌는 일부 병력을 삼수에 머물게 하고, 11월 11일 주력 부대를 이끌고 갑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추적하였지만 끝내 의병부대를 찾아낼 수 없었다. 추적에 지친 토벌대는 19일 빈손으로 갑산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홍범도가 이끄는 산포대(山砲隊)의 유격작전(遊擊作戰)은 너무 신출귀몰(神出鬼沒)하여 일본군의 토벌대는 도처에서 신경을 소모하고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일본군도 전술을 바꾸어 의병부대와 민중이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포위작전(包圍作戰)을 강화하는 한편, 의병들에 대한 귀순 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사냥이 생업인 포수들의 가정은 일본군 토벌대에게 포위되어 굶주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관리와 부일파를 내세워 산포수 의병 가족에게 돈과 식량을 주면서 포수들이 의병부대를 이탈하여 귀순하면 생명을 보장하고 생활 안정도 보장하겠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늘어놓고, 의병들이 집으로 들어오도록 연락하라고 권유하며 다녔다. 굶주림에 신음하던 의병 가족들 가운데 동요가 일어나고, 식구의 연락을 받은 의병 가운데서도 탈락자가 생기게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낼 때까지 목숨 걸고 끝까지 싸우기로 맹세한 산포수 의병부대였지만, 가족을 아사 상태에 몰아넣은 일제(日帝)의 비열한 회유책에 결속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하 30도를 넘는 극한 속에서 식량도 없이 산속을 배회하는 의병들의 고통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때 홍범도의 둘도 없는 동지였던 차도선이 1908년 3월 17일에 마침내 적군의 공작에 넘어가 신의를 저버리고 부하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자 의병부대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용장 태양욱(太陽郁)이 적군의 미끼에 걸려 체포되었다. 적군은 태양욱도 귀순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남은 의병들에게 굴복할 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태양욱은 어떠한 회유와 고문도 물리치며 조국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다가 끝내 일본군에게 처형되고 말았다. 차도선의 배신에 분노한 산포대(山砲隊) 대원들은 태양욱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일제 침략자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죽기를 각오한 항일투쟁(抗日鬪爭)에 나섰다. 일본군의 잔악 행위는 악랄하기 그지없어서 의병부대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마을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홍범도의 부대는 점점 기세를 올려서 함경도 일대에는 그의 의병부대가 출몰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애가 닳은 일본군은 토벌대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홍범도 귀순 공작을 필사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 경시 김원흥(金元興) 이하 11명의 조선인 순사들로 홍범도 귀순 공작대를 만들고 그들을 2대로 나누어 홍범도 부대의 근거지에 잠입시켰다.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홍범도는 그들을 일망타진한 뒤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그 매국노들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 자리에서 권총을 쏘아 처형해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한층 높아졌다고 한다. 그 뒤에도 홍범도 부대의 활동은 용맹과감하였으나, 1909년이 되면서 일제의 압박이 갈수록 강화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그물망이 철벽처럼 둘러쳐졌다. 그리하여 국내에서 계속 대일의병항쟁(對日義兵抗爭)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 독립군에 바친 평생 홍범도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0년 초 40여명의 부하들만 이끌고 국경을 넘어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는 간도 지방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해 3월부터 장백현(長白縣) 왕개둔(王開屯)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조국으로 진공할 부대를 육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의 부하인 박영신(朴永信)은 이렇게 단련된 젊은 애국 청년들을 이끌고 1911년 3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 수비대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가 엄중해짐에 따라 이러한 기습 작전을 거듭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무엇보바도 독립운동을 위한 기본 조직을 만드는 길고 소박한 싸움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홍범도 산포수 부대는 사냥 생활로 단련된 만큼 밤낮 살다시피 한 익숙한 산야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겨냥한 목표물을 단 한 발에 맞힐 수 있는 백전용사들의 집합체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출귀몰한 전투가 가능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서로 돕는 강한 동료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곤경에도 견디며 단결하여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간도에 있는 한국 교민들은 애국심이 강했지만 그 출신이 각양각색이고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이 적었으며, 또한 거의 무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독립군을 기르려면 먼저 기초적인 교육부터 시작해야 했고, 또한 생존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생산적인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민한 지방에서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종자를 뿌리고 토지를 기름지게 하는 등 농업의 기본 작업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생산량이 적어서 겨우 굶주림만 면하는 정도였으므로, 학교를 만들고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재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맨손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일찍이 이곳에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놓기는 하였지만 아직 무력항쟁(武力抗爭)을 벌일 만큼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홍범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여 겨우 한글을 읽을 수 있을 분이었으므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지도할 만한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갖고 있던 기술과 능력만으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애국 운동에 대중을 동원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 겸허한 그는 국외로 이주한 후로는 그늘에서 성실하게 일할 뿐이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간도를 비롯한 만주 각지에서도 애국지사들의 대표자 회의가 생기고 독립 만세 시위가 잇달았으며, 혈기 왕성한 독립군 병사들은 빈번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이처럼 민족적인 독립 의식은 단숨에 불타올라 군사 훈련이 활발해지고, 애국 청년들은 일본의 행정기관을 잇달아 습격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금세 홍범도의 지도력이 발휘되어 1919년 8월 그는 국민회(國民會)라는 단체에서 구성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총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그리고 2백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건너 혜산과 갑산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돌아오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 해 가을 그는 다시 부대를 거느리고 자성, 강계, 만포진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자성에서의 전투는 사흘간 혈전을 벌여 일본군 70여명을 살해했지만, 독립군 측의 피해도 컸다. 홍범도는 복수를 맹세하고 다시 대대적인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일본군 제19사단 남양 수비대가 간도에 침공하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및 신민단(新民團) 일부 병력과 더불어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서 매복작전(埋伏作戰)을 펼쳐 일본군을 사면에서 포위하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거듭되는 패배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이 고양되는데 안달이 난 일제(日帝)는 같은 해 10월 중국 당국에 한국 독립군을 공동으로 토벌할 것을 제의하고 북부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력을 총동원하여 만주의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제가 간도지방에 대한 군사작전을 결행하기 위해 명분을 만들려고 10월 2일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한 것이 한 구실이 되었다. 중국 당국이 일본군의 이러한 침략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전 부대를 셋으로 편성하여 10월 14일 일제히 행동을 개시,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 일대의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아즈마[東] 소장(少將)이 이끄는 일본군 대부대는 독립군 연합사단이 두도구(頭道溝) 서쪽 24km 되는 청산리(靑山里)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단숨에 포위작전(包圍作戰)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총지휘하는 독립군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백운평(白雲坪)에서 일본군 기병연대를 공격하여 적병 2천여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완루구(完樓溝)에서 아즈마[東] 지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여 적병 4백여명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어랑촌(漁郞村)에서는 홍범도와 김좌진의 부대가 합세하여 일본군 진영에 맹렬한 공격을 가해 적병 1천여명을 사살하는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니, 이것이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 최고의 승리인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였다. 결국 일본군의 대대적인 중국 침략 토벌전도 독립군의 전력을 완전히 와해시키려는 당초의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한 채 치욕스러운 패전(敗戰) 기록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굴욕을 만회하기 위하여 악귀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간도지방에 있는 한국 교민들의 주거지를 남김없이 불질러 버리고 죄없는 주민들을 수없이 학살했다. 그리하여 만주에 근거지를 둘 수 없게 된 독립군은 소련의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연해주로 건너간 독립군 수뇌부는 적군(赤軍)의 협력을 얻어 고려혁명군의용대(高麗革命軍義勇隊)를 구성하고 소련 원동정부에 협력하면서 대대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인 소련에 진주한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소련 내의 한국 독립군을 무장 해제시킨다는 협약을 맺고, 그 협약에 따라 1921년 6월 소련 원동정부는 독립군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 일방적인 배신 행위에 분노한 독립군의 일부는 소련 측의 설득을 거부하고 6월 28일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소련군과 접전을 벌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불리는 이 무력충돌(武力衝突)로 독립군은 전사자 270여명, 실종자 250여명의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다. 그리고 독립군의 일부는 소련 측의 설득에 따라 소련 내에 머물고, 일부는 다시 만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홍범도는 함께 용감히 싸워온 많은 독립군 동지들이 만주로 옮겨가자, 동지들과 작별하고 소련에 머무르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길을 택하였다. 평생 애국심으로 일관한 홍범도는 줄곧 가난한 자의 편에 선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소련이 말하는 사회주의에 어떤 기대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뒤 홍범도가 소련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계속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다가 1943년 소련 땅에서 76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민중이 고통받고 있을 때, 전국 방방곡곡의 마을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용맹스러운 홍범도 장군의 의병항쟁(義兵抗爭)과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관련된 무용담(武勇談)을 들려주었고, 애국적인 지사들은 후배 청소년들에게 한국 독립군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승리를 이야기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길러주었다. 아마 앞으로도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실로 그는 민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웅적인 항일투사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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