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정신

[스크랩] 서산대사의 오도송을 아시나요?

arang 2519 2012. 11. 20. 22:10

오도송[悟道頌]이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를 이르는 말으로, 게송(偈頌)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오도송이 있지만, 그 중 유명한 것의 하나가 서산대사의 오도송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을 위하여 애를 쓰신 백범 김구선생이 서산대사의 오도송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오도송은..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안 센다고
古人曾漏洩 (고인증누설)    옛사람 일찍이 일렀구나.
今聽一聲鷄 (금청일성계)    이제 닭 울음소리 듣고
丈夫能事畢 (장부능사필)    장부의 큰일 마쳤네.
忽得自家處 (홀득자가처)    홀연히 본 고향을 깨달아 얻으니
頭頭只此爾 (두두지차이)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萬千金寶藏  만천금보장     팔만사천의 대장경도 

元是一空紙  원시일공지     본래 이 하나의 빈종이 일뿐이구나 

 

 

이에 대한 참고글을 네이버 지식에서 옮겨 와 보았습니다.

 

 

 

머리카락은 우리의 겉모습입니다.
겉 모습은 나이에 따라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은 젊고 늙고가 따로 없습니다.
이 마음은 보고 듣고 맛봄에 따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마음,
참된 마음, 깨끗한 마음인 본원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았으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친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마음이고,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다고 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이 지혜롭고 변하지 않는 마음을 찾는 일은 우리가 염불하고
참선하고 기도하는 최후의 목적일 것입니다.

'성불합시다!' 라고 하는 인사말은 그냥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변함없는 마음을 찾아내어 다 같이 행복하게 살자는 우리네 바람입니다.

 

<장부의 큰 일>  이란 부처께서 깨달으신바 뭇 중생의 본원자성을을 찾는 일이며

<마쳤다> 함은 깨달아 이루었다 고 풀이됩니다.


 

 

 

 

테야르 드 샤르뎅이라는 신부는 오메가 포인트라는 개념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메가 포인트란 깨달음에 이르는 최종시점을 의미합니다.

알파라는 탄생에서부터 끊임없는 윤회를 거쳐 마지막으로 최종 종착지인 오메가 포인트에 도달함을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수행을 한 끝에 오메가 포인트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마음은 희지않다에서 마음이란 불교방송의 금강경 강의( www.btn.co.kr  에서 방영한 바 있습니다.)에서 현각 스님이 말씀대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Clear Mind라고 하죠. 명료합니다.  어둠이 가고 새벽이 오면 닭이 웁니다. 새벽은 모든 것을 명료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둠의 밤과 같은 고행을 끝내고 깨달음의 새벽을 알리는 것을 닭울음 소리에 비유한 듯 합니다.  장부의 큰 일이란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다음은 서산대사의 오도송관련 경향신문의 참고 글의 내용입니다.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忽得自家處 頭頭只此爾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의 ‘그 꽃’ 전문이다. 산에 오를 때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 산에 올라 산을 품었다가 그 자리에 내려놓고, 빈 몸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보인다. 삶도 삶을 내려놓을 즈음에야 비로소 보이는가. 삶의 끝자락에 선 노(老) 선사들의 임종게(偈)는 삶의 시야를 확 틔워 준다. 서산대사가 85세로 입적할 무렵 지은 시다.

“80년 전 옛적에는 네가 나였고, 80년 후 오늘에는 내가 너로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고은 시인의 번역을 취했다. 그는 3인칭 대명사 ‘그(渠)’를, 2인칭인 ‘너’로 옮겨 시의 과녁을 좀 더 좁혔다. 그의 글이다. “서산대사는 여섯 살 때 모래로 탑을 쌓고 돌멩이로 절을 지었다 한다. 열 살에 부모를 잃었다 한다. 그 어린 고아가 시를 줄줄 지었다 한다. …나이 85세의 임종에도 실로 확 트인 시가 나왔다. 제자 사명과 처영이 곁에 있었다. 도무지 늙을 줄 모르는 정신의 청춘이 여기 있다.”

석양에 꽃을 품는 마음이나, 떠나며 동심으로 돌아간 청춘은 닮아 있다. 도무지 늙지 않는 정신들이다. 한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서산대사는 ‘성관(聲觀)’이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말했네. 오늘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다 마쳤네. 홀연히 나를 발견하니 …천언 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空紙)였어라.” 깨달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삶은 본래가 빈 종이쪽이었다. 어쩌면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우고 비워,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삶인지도 모른다.
[출처]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181841095&code=990201

 

 

 

뜬금없이 서산대사의 오도송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이 글쓴이의 메일로 전하여 온,

브레인 월드가 제공하는 명상의 글 때문입니다.

 

브레인 월드의 메시지 내용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휴 가족 여러분^^

 

평소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을 다른 사람이, 특히 우리 아이가

그대로 따라하거나 그것이 습관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부모라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라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가까운 사람들의 행동이 닮는 다는 것 처럼,

친한 친구나 가족들의 말투나 행동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독립된 개체로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지요.

나의 말이나 행동에 누군가 영향을 받고, 그것을 멘토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좀 더 어른스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요?


언제나 사랑합니다^^

 

 

 

[출처]http://fitness.brainworld.com/BrainFitness/BrainRelaxView.aspx?contIdx

=9107&menuCd=BrainRelax&contentKey=VkRGU1JtUX

 

우리가 흔히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좋은 말을 계속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가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

모두 예사롭지 않습니다.  권영철.

 

 

 

 

서산대사는 누구인가?

 

법명이 휴정으로 불리우는 조선시대 조일전쟁(임진왜란)때 의병장인 서산대사..

그는 사명대사라고 불리우는 유정의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서산대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1520(중종 15)∼1604(선조37). 조선 중기의 승려·승군장(僧軍將).

 

[개설]완산 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고 법명은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생애]3세 되던 해 사월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 華嚴經≫·≪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 般若經≫·≪법화경 法華經≫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음)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 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 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활동사항]휴정의 선교관(禪敎觀)에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그 진수를 밝히고 확립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一切衆生悉有佛性)’ 때문에 누구나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문(聖道門)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선교관은 석가모니 이후로 면면히 이어온 전통적인 불교관(佛敎觀)에 근거를 둔 것이며,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의 뜻을 삼처전심(三處傳心:부처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함)과 오교(五敎)로써 풀이하였다.

 

또,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세존(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부처님께서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 곳이라 함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多子塔前 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靈山會上 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밖으로 내보이심(沙羅雙樹 示雙趺)이 셋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선지의 근원을 밝혔다.

이어 “부처님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이니, 첫째는 인천교(人天敎)요, 둘째는 소승교(小乘敎)요, 셋째는 대승교(大乘敎)요, 넷째는 돈교(頓敎)요,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교의 근원을 밝혔다.

 

이는 선교의 근원을 밝힌 일종의 교상판석(敎相判釋:부처의 가르침을 나누어 분석함)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같이 동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휴정의 선교관은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되어, 깨달음에로 나아간다고 보았고,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선교의 관계에 대하여 교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먼저 모든 법을 가려서 보이고 다음에 공(空)의 이치를 가르친 것인데, 이 공의 이치에 곧바로 들어가서 체득하는 것이 선이며,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그 자취가 뜻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선교에 관한 정의를 간추려보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 敎是佛語)이며,

② 실재를 증득함이 없는 선지는 교의 흔적일 뿐이며, 마음을 얻은 자는 교문만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헛된 수작까지도 먼지가 된다.

③ 선은 분별이 없는 경계를 뜻대로 오가는 천지간의 한도인(閑道人)이며, 교문의 8만 4000법문은 일심(一心)에 귀착하며 일념회광(一念廻光)으로 심성(心性)을 뚫어보는 견성일의(見性一義)에 귀결한다.

④ 교문은 공을 설파하여 유상(有相)의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며, 조사선의 목적은 언하(言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게 함으로써 언어와 문자에 잡힌 분별을 끊고 자기의 영광(靈光)이 천지에 비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⑤ 교는 활과 같아서 우여곡절이 있지만, 조사의 격외선지(格外禪旨)는 직선의 활줄과 같아서 모든 차별을 여의고 일체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일미(一味)에로 직입(直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관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양종을 제도상으로 통합하기 위한 토대로서 선교관을 정립할 필요를 느껴 그는 ≪선교석 禪敎釋≫을 저술하였다.

≪선교석≫은 독단을 피하고 옛사람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론을 논리정연하게 설득시켜 선이 주요, 교는 선에 추종한다는 이론을 내세운 것으로 의의가 깊다.

즉, 선적(禪的)인 통일불교의 토대를 굳힌 것으로 재래의 선문에서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타파하고 있는데, 전통을 전수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지를 구명함에 있어서의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그 예로 ≪능엄경≫을 선의 소의경전으로 삼아 오던 종래의 전통을 한낱의 갈잎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고, ≪반야경≫에 대해서도 성문(聲聞)을 위한 방편문(方便門)이 어찌하여 선종의 종주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반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만 중히 여기고 마음을 가벼이 보면 비록 수많은 겁(劫)을 닦는다 하더라도 천마외도(天魔外道)를 지을 뿐이라.”는 고덕(古德)의 말을 인용하여 혹평하였다.

 

그리고 필경의 이치인 선의 본지, 즉 부처님의 본심에 대하여 “자기의 본분 위에는 본래 명자(名字)가 없지만, 방편으로 그것을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의 차이를 논하면서 선과 교를 통합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선교일치의 입장보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그는 염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염불과 선을 일치시키려는 목적에서 “부처님은 상근인(上根人)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이 정토(淨土)이며 자성(自性)이 곧 미타(彌陀)이다(淸虛堂集 권4)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성미타’가 ‘자심정토’로 이룩됨을 강조한 것이다.” 하였다. 이러한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은 그의 선지의 진리와 상통하고 있다.

휴정의 법맥, 즉 그 사상의 계통을 그 자신이 언명한 것을 보면, 벽송(碧松)은 조(祖)요, 부용(芙蓉)은 부(父)며, 경성(敬聖)은 숙(叔)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직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의 말에 의하면, “태고(太古, 普愚)화상이 중국 무하산(霧霞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을 사(嗣)하여 이것을 환암(幻庵)에게 전하였으며,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구곡은 정심(正心),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지엄은 영관에게, 영관은 서산에게 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휴정의 법맥은 중국 5가 7종 중의 한 종파인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며, 우리 나라의 임제종조인 보우의 7대손이 된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가 70여 명이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현빈인영(玄賓印英)·완당원준(阮堂圓俊)·중관해안(中觀海眼)·청매인오(靑梅印悟)·기암법견(寄巖法堅)·제월경헌(霽月敬軒)·기허영규(騎虛靈圭)·뇌묵처영(雷默處英)·의엄(義嚴) 등이 특히 유명하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4권 2책과 ≪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선교석≫·≪운수단 雲水壇≫·≪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제산단의문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편, 백범 김구선생과 그의 저서 '백범일지'에 대하여는, 이 글쓴이의 또 다른 게시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클릭하여 보세요.

http://blog.daum.net/kk1990/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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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황 제 불 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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