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13.에 선고된 한 대법원판결(2007다73611호)을 두고, ‘계약금없는 계약도 무시될 수 없다’는 판결이 선고되었다고 하면서 최근 언론에서 크게 보도되고 있는데, 법리가 복잡해서 이해가 어려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 사안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부동산거래문제를 자주 다루는 필자로서는 이미 몇 년 전에 이 사건 법리에 대해 이 번 대법원판결과 비슷한 의견의 칼럼을 게재한 바 있는데, 그 후 칼럼과 다른 취지의 하급심판결이 선고되어 이 하급심 판결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칼럼을 다시 게재한 적이 있었고, 필자가 의문을 제기한 바로 이 하급심판결을 파기하는 대법원판결이 3월 13일에 선고된 이 판결이다. 결국 동일한 쟁점으로 3번씩이나 글을 쓰는 셈이다. 때문에 필자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관심있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시작]■ 사안의 개요
사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실제 사안을 약간 압축하여 정리한다.
甲 소유명의로 된 아파트를 甲의 장모인 乙이 대리인 자격으로 나와 丙에게 매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은 6천만원으로 정했지만, 계약당일 丙이 준비한 돈이 전혀 없어 계약금은 다음날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계약을 체결한 바로 그날 乙은 아파트매매사실을 甲에게 보고했으나 甲으로부터 아파트매매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되자, 다음날 오전에 바로 이 사실을 丙에게 알리고 ‘계약진행을 할 수 없으니 계약금을 송금하지 말라’고 통고했는데, 丙은 이에 불구하고 계약금 6천만원을 일방적으로 송금해버렸다. 그후 甲과 乙은 매매계약의 효력을 부인하고 이전등기를 거부하면서, 일방적으로 송금된 계약금 6천만원도 丙 앞으로 변제공탁하는 방법으로 되돌려주었다. 이에 丙은, 甲과 乙을 공동피고로 계약서상 ‘계약을 위반하는 사람이 계약금 상당의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위약금 약정을 근거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甲을 주위적으로 乙을 예비적 피고로 삼았다.
■ 법원의 판단
▶ 재판 과정에서 甲, 乙은 공히, 甲이 장모인 乙에게 매매계약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1심 법원은 乙의 대리권이나 표현대리책임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甲에 대한 청구는 인정하지 않은 반면, 乙에 대해서는 無權代理人으로서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다만 계약서상의 정해진 위약금은 비록 6천만원이지만, 계약 다음날 계약철회의 의사가 표시되고 지급받은 계약금을 바로 돌려준 점 등을 감안하여 배상액은 2천만원으로 감액하였다).
▶ 이에 반해 항소심 법원(서울고등법원 2007. 9. 20. 선고 2006나107557호)은, 甲에 대한 청구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1심 법원과 결론을 같이 했지만, 무권대리인인 乙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하였다.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계약의 효력에 대해 1심 법원과 다른 견해를 취했기 때문이다.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고 있는 단계에서의 계약효력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계약금은 연혁적으로 계약체결의 증거로서의 성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계약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하여 온 점, 민법 제565조도 계약당시에 계약금이 교부된 경우에 원칙적으로 계약해제권 유보를 위한 해약금의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당사자 사이에 매매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매수인이 매도인에게 계약금을 지급하기로 약정하였음에도 미처 이를 교부하거나 실제로 그와 동일한 이익을 받은 단계에 나아가지 못한 상태라면, 계약금계약은 요물(要物)계약이기 때문에 아직 성립하였다고 볼 수 없음은 물론, 약정에 따른 계약금이 지급되기 전까지는 계약당사자의 어느 일방이든 그 계약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이를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해제권이 유보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이 때 그 해제를 위하여 매수인이 미처 지급하지 못한 계약금을 매도인에게 지급할 의무를 여전히 부담한다거나 그 해제에 대한 책임으로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약정한 계약금의 배액을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이러한 법리는 계약금에 관하여 위약금약정이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판단하였다.
▶ 하지만 대법원은, 고등법원과 다르게 법리를 해석했다.
대법원은, “--계약이 일단 성립한 후에는 당사자의 일방이 이를 마음대로 해제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고, 다만 주된 계약과 더불어 계약금계약을 한 경우에는 민법 제565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임의 해제를 할 수 있기는 하나, 계약금계약은 금전 기타 유가물의 교부를 요건으로 하므로 단지 계약금을 지급하기로 약정만 한 단계에서는 아직 계약금으로서의 효력, 즉 위 민법 규정에 의해 계약해제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가 계약금의 일부만을 먼저 지급하고 잔액은 나중에 지급하기로 약정하거나 계약금 전부를 나중에 지급하기로 약정한 경우 교부자가 계약금의 잔금이나 전부를 약정대로 지급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계약금 지급의무의 이행을 청구하거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금약정을 해제할 수 있고, 나아가 위 약정이 없었더라면 주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정이 인정된다면 주계약도 해제할 수도 있을 것이나, 교부자가 계약금의 잔금 또는 전부를 지급하지 아니하는 한 계약금계약은 성립하지 아니하므로 당사자가 임의로 주계약을 해제할 수는 없다--” 고 하고, “--계약금이 교부되지 아니한 이상 아직 계약금계약은 성립되지 아니하였다고 할 것이니, 매도인측은 매수인인 원고의 채무불이행이 없는 한 이 사건 매매계약을 임의로 해제할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 사건 계약금을 수령하기 전에 원고가 일방적으로 한 이 사건 매매계약 해제의 의사표시는 부적법하여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런 논리를 통해, 이 사건 매매계약이 계약금이 지급되기 전에 매도인측에 의하여 적법하게 해제되었음을 전제로 매수인 丙이 무권대리인인 乙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한 고등법원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론적인 용어가 많고 법리가 복잡해서 사안을 축약해도 어렵게 느껴질 수 있어, 쟁점만을 놓고 다시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결국 위 사안의 핵심은, 계약금이 현실적으로 지급되지 않은 계약의 구속력이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 법리만을 놓고 사안을 다시 구성해보기로 한다. 위 사안은 6천만원을 계약금으로 정하고도 실제로는 전혀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해제가 문제된 사례였지만, 만약 계약금 없이 한달 뒤에 대금 전액을 지급하고 이전등기를 하는 부동산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가정해보자. 혹자는, 계약금이 없는 계약도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연히 가능하다. 법적으로는 계약금이 계약의 필수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약금을 정하지 않은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 계약당사자 중 어느 일방은 아무런 부담없이 임의대로 계약을 해제할 수는 있을까? 바로 이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고, 위 고등법원 재판부의 법리오해도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했다. 언뜻 생각하면,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금을 수수하지 않으면 계약의 구속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체 거래금액에서 계약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계약금 액수에 비례해서 계약위반에 따른 불이익이 크다고 생각하고, 또 계약을 해제 즉, 해약하기 위해서는 약정된 계약금만큼의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는 생각의 연장선에서, 계약금이 적은 계약일수록 계약에서 오는 구속력이 약해지고 따라서 계약금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구속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학교 근처 하숙집을 구할 때 임대차계약하고 몇 십 만원 맡겨두고 오는 경우에 계약의 구속력이라는 것은 맡기고 온 그 계약금 액수만큼의 부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계약금 없이 계약서만 쓰고 왔다면 계약에 따른 부담도 전혀 없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 때문에 우리 부동산거래관행은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계약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경솔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권리를 취득하는 측에서나 권리를 파는 측 모두, 계약금이 없으면 계약을 무시해도 되는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는 것이다. 사업진척상황에 따라 향후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으로 부동산매매대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는 아파트사업시행자에게 계약금도 없이 부동산을 매매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오해일 수 있다. 오히려, 계약금 없는 계약이 계약의 구속력이라는 면에서는 더 막강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해약에 관한 규정인 민법 제565조를 보면, “매매의 당사자일방이 계약당시에 금전 기타 물건을 계약금, 보증금등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교부한 때에는 당사자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라고 하여, 계약금이 교부된 때는 계약당사자간에 수수된 계약금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을 반대로 해석하면,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계약에서는 이런 일방적인 해약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수수한 계약금의 다과에 따라 계약위반에 따른 부담의 정도는 비례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법리는 계약금이 수수되었을 경우라는 점에서,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경우에 계약위반에 따른 부담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법리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계약금을 적게라도 건 계약은 민법 565조상으로 ‘계약금 정도의 적은 부담을 서로 가지자’라는 서로간의 약속이 있는 것으로 해석가능하지만, 계약금이 전혀 없으면 해약에 관한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될 뿐이지, ‘계약을 정리하는데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말자’라고 합의된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물론, 계약금 없는 계약이 무조건적으로 구속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인 계약해석상, 구속력을 생각하지 않고 서로 합의하에 계약금없이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금이 없거나 아직 수수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마음대로 무시하는 지금의 우리 관행이 계약해제에 관한 법리와는 분명 거꾸로 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보다 계약에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상-
■ 참고법령
민법 제135조 (무권대리인의 상대방에 대한 책임)
① 타인의 대리인으로 계약을 한 자가 그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본인의 추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상대방의 선택에 좇아 계약의 이행 또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
② 상대방이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 또는 대리인으로 계약한 자가 행위능력이 없는 때에는 전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로티스합동법률사무소(www.lawtis.com) 대표변호사 최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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