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奇古史(단기고사)
발해국 대야발이 천통(天統) 31년 (A.D 729)에 지은
고조선 3한(三韓:진한,마한,변한)중 진한의 단군조선의 실사이다.
고구려에는 우리의 근거와 그 경로를 기록한 많은 사서들이 있었다. 나라가 망할때에 점령군은 그 사서고까지 태워 버렸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를 일으킨 대조영은 동생인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단기고사>를 편찬하게 했다.
명을 받은 대야발은 흩어져 있던 사서를 모으고 비문을 확인하며 돌궐국까지 여러번 답사하는 등 13년 노력 끝에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원래 발해문으로 목판에 새겨 나라에서 보관하였으며 교육용으로는 이를 베껴 사용했다. 그 후 건흥8년(서기 825) 4월 발해의 대문호인 황조복이 한문으로 옮기고 장상걸이 주석을 달아 펴냈다.이 한문본이 전해져오다가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 선생이 중국의 한 서점에서 이 '황조복판'을 발견하고 입수하게 되었다. 이를 그의 문하생인 이윤규를 시켜 수십권 등사하게 했다.
이윤규 선생은 당시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에게 이를 건네주어 광무11년 (1907년)에 간행했으나 일제에 의해 소각되고 말았다. 그 후 임자년(1912년) 이윤규 선생의 아들인 화사 이관구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만주 안동현에서 출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 광복운동에 투신했던 이관구 선생은 갖은 박해속에서도 이를 숨겨오다가 광복 후 서울에서 해암 김두화 선생과 함께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이시영 선생의 교열을 거쳐 1949년에야 겨우 펴내게 되었다.
이 '1949년'판도 6.25 동란으로 거의 없어지고 몇권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관구 선생이 갖고 있던 한문본도 이 때에 서울 성북동 집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대한신보에서 편찬할 [대한민국태고사보감] 참고 자료입니다
檀奇古史(단기고사)
고조선 3한(三韓:진한(辰韓),마한(馬韓),변한(弁韓)중
제 1 편 고조선 진한(辰韓) 의 단군왕검 (檀君王儉)
환씨전(桓氏典)에, 동방에 부여족(夫餘族)이 태백산(太白山) 부근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환인(桓仁)은 관대하고 도량이 커서 가옥의 건축과 의복제도를 시작하고, 아들 환웅(桓雄)을 낳으니, 그 뛰어난 모습을 호걸이라 했다.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사람을 널리 구제하시니, 풍백(風伯)과 운사(雲師)와 뇌공(雷公)등을 거느리고 천평(天坪)[주:天坪-길림(吉林)동쪽]에 이르러 음식절차(飮食節次)와 혼인규례를 창설하시고 천부경(天符經), 81자로 되어 있고 우주의 창조원리 곧 하늘과 땅과 사람의 생성원리를 적었다.
옛 우리 글로 되어있던 것을 신라의 최치원이 한문으로 옮겼다함]을 설교하시니, 사방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듣는 자가 많았다. 환웅(桓雄)이 아들 환검(桓儉)을 낳으니,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이시다. 장성하여 비서갑(非西岬)[주:非西岬-만주 할빈근방이라고 함] 하백(河伯)의 딸을 아내로 삼고, 아들 부루(扶婁)를 낳으니 이분이 부여족의 시조가 되었다.
제 1 세 단군왕검 (第一世 檀君王儉)
―93년간 재위―
단군왕검은 제 1세 단제(檀帝)시니, 환웅의 아들이며, 환인의 손자이다. 신성(神聖)하시고 문명(文明)하시며, 인애(仁愛)하시고 자비하셨다. 또한 도(道)는 천지에 통하시고, 덕이 사해(四海)에 미쳤으며, 구이족(九夷族)[주:우리의 옛 환국(桓國)의 아홉족속 곧 견이(畎夷)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을 다스렸다.
또한 종교를 창립하여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주:三一神誥-단군 이전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경전. 천훈(天訓) 신훈(神訓) 천궁훈(天宮訓) 세계훈(世界訓) 진리훈(眞理訓)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신지(神誌)씨가 옛 우리글로 쓴 것을 왕수궁(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지고,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에 해석해 놓은 한문본만 남아 있다]를 천하에 널리 알리시고, 366사(事)의 [참전계경] 신정(神政)으로 정성스럽게 교훈으로 삼으시니, 그 덕은 천지에 견줄 수 있고 그 밝음은 해와 달과 같았다. 그 교화를 받은 모든 백성들이 10월 3일에 총회를 열어 환검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제 1세 단제(檀帝)시다.
부여길림평양(扶餘吉林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부여조선(扶餘朝鮮)이라 하였다. 돌아가신 환웅을 높이 추대하여 지일(地一)이라 하고, 환인(桓仁=王考公)을 추대하여 천일(天一)이라 하고, 맏아들 부루(扶婁)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그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주:紫府先生-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고도 한다. 신시(神市)시대의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이며 동방 청구(靑丘)의 대풍산(大風山) 삼청궁(三淸宮)에 있었다.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주셨는데 수신(修身)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는 도리이었다. 도교(道敎)를 편 노자(老子)는 황제(黃帝)에게서 배웠고 황제는 자부선생으로부터 배웠다. 이로서 중국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었다.]이라 하는 도(道)가 높은 분이 있었는데,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하고 아래로 지리(地理)를 살피며, 도덕(道德)이 고상하므로 중화(中華)의 훤원(軒轅)[주:軒轅-중국의 황제(黃帝)를 말한다.
성은 공손(公孫)이다.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상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도교(道敎)의 기초를 닦았다. 치우천황(蚩尤天皇-제14세 慈烏支桓雄)과 싸울 때 치우천황이 그때 처음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안개를 일으키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어 방향을 알리는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기도 했다]이 와서 수학(修學)한 후에 내황문(內皇文)-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봉하여 환부제(桓夫帝=光明王)를 삼았다.)
임금께서 신우(神佑)에게 명하시기를 “백성들에게 오륜(五倫)을 가르치며 관후(寬厚)와 박애 (博愛)를 명심하라.”하시고, 또 고시(高矢)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사농관(司農官)이 되어, 농민에게 농사를 가르쳐 온갖 곡식을 심어 추수하게 하되 때를 놓치지 말라.”하시고, 또 신지(神誌)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사악(司樂)이 되어, 백성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마음과 정신을 화창(和暢)하게 하라.”하시고, 또 해월(海月)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사공관(司工官)이 되어, 모든 공인(工人=匠人)들에게 각기 기능에 따라 기구를 제조하게 하여 날마다 생활에 쓰이는 물건을 공급하게 하라.”하셨다.
또 운목(雲牧)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감시관(監時官)이 되어 춘 하 추 동 네 계절을 정하되, 72후(候) 24절(節)을 정하여 농업에 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시고, 또 마옥(磨玉)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미술관(美術官)이 되어 미술발명품(美術發明品)에 전력을 다하라.”하셨다
또 팽오(彰吳)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개척관(開拓官)이 되어,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전력을 다하여 침수와 도로가 막히는 일이 없게 하여 백성이 살아가는데 안전하도록 하라.”하시고, 또 원보팽우(元輔彰虞)에게 명하시기를 “자네는 신(神)을 섬기는 일을 맡아서 백성을 가르치되, 하늘은 형체가 없고, 위 아래 사방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으며, 어디에나 없는 데가 없으신 으뜸가는 신(神)이,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능력이 있어 수없이 많은 세계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셨다.
우주는 무한한 대권(大圈)이요, 천도(天道)는 무한한 정권(正圈)이요, 인도(人道)는 무한한 정축(正軸)이요, 물정(物情)은 유한한 횡축(橫軸)이다. 정권(正圈)에서 정축(正軸)에 직사(直射)하는 것은 모든 사상(思想)이요, 정축(正軸)에서 정권에 반사(反射)하는 것은 성력(誠力)이니라. 판단하는 주체는 곧 나요 생각하는 실재(實在)니, 이것이 일신(一身)의 영주(靈主)라.
우주 자연 몸으로 더불어 서로 융회(融會)하여 비정(秘情)을 교환하는 곳이 영대(靈台)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심(宗敎心)을 이곳에서 일으키게 하느니라. 오직 정(精)하고 오직 하나(一)되어 그 중추(中樞)를 잡아야 그 정(正)을 잃지 않는다.“하셨다.
임금께서 천하를 다스리신지 120년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안락하며, 비와 바람이 알맞으며 병이 없고 장수하며, 산에 도적이 없고 집에 곡식이 많이 남으니, 밤에 문을 닫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며, 노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영가(詠歌)를 부르고 아이들은 춤을 추었다.
사람마다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집집마다 천단(天壇)을 만들고 새벽마다 하느님을 경배하니, 이 때부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상이 확고하였다.
125년 7월 5일에 셋째 아들 부우(扶虞)를 강화(江華)에 보내 전등산(傳燈山)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게 하시며, 제천단(祭天壇)을 마니산(摩尼山)에 쌓고 하느님께 제사하시니, 동방 민족이 하느님께 제사하는 풍속은 시조 단제(檀帝)때부터 시작되었다.―천단제도(天壇制度)는 천일지이(天一地二)를 따라 돌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돌 하나를 덮었다.
150년에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니 왕위에 계신 지 57년이며 제위(帝位)는 93년이다. 백성들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사해(四海)가 다 음악을 그치고, 집집마다 시조 단제의 신위(神位)를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경배하였다. 태자 부루(扶婁)가 왕위에 오르니 제 2세 단제시다.
제 2 세 부루(扶婁)
―58년간 재위―
첫해 9월에 가운데 아우 부여(扶餘)를 망구왕(茫球王=遼西)으로 삼고, 셋째아우 부우(扶宇)를 동해왕(東海王=東海邊)으로 삼으니 삼한(三韓)은 동해왕의 후세이다.
2년 봄 1월에 대련(大連)은 섭사직(攝司職)으로 삼고, 소련(小連)은 사도(司徒)로 삼았다. (震檀紀에 大連의 地方은 半島라 했다.)
대련(大連)과 소련(小連)은 단조(檀朝)의 중신(重臣)이다. 충효(忠孝)를 갖춘 사람으로 친상(親喪)을 당하니 3개월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3년동안 서러워하니, 이것은 동양윤리(東洋倫理)의 원조(元祖)이다. (이러한 사실은 孔子의 글에도 나온다.)
고수(高叟-漢記에는 瞽瞍)는 중신 고시(高矢)의 친형이다. 고수(高叟:유호씨) 아들 순(舜)중국의 순(舜)임금]이 단조(檀朝)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이웃 당요조(唐堯朝)[唐堯朝-요임금 때]에서 벼슬을 하니, 부자(父子)의 의견이 서로 달라 마침내 화목하지 못하게 되어, 고수는 작은 아들 상(象)을 사랑하고 순은 죽이고자 하였다. 순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효성으로 섬기며 끝까지 손복하니 당요 (唐堯)가 신임하고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순이 이렇게 되어 중화(中華)의 천자(天子)가 되어 문명한 정치를 하니, 사농공상(士農工商)에 각기 직업을 주고 우(禹)[주:禹-중국 하(夏) 왕조의 시조.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음]의 아버지를 익산(翊山)에서 목을 쳐 간악한 무리를 내쫓았다. 이 때문에 한족(漢族)이 순을 꺼려오다가 우의 덕망이 날로 높어지더니, 순이 왕위에 오른지 61년에 창오야(蒼梧野)에 행차하다가 한족(漢族)에게 해를 다해 승하했다.
이렇게 되니, 순의 아내 아황여영(娥皇,女英)이 원한이 사무쳐 수상강(瀟湘江)에 빠져 죽었다. 그 아들 상균(商均)은 다시 고국에 돌아와 단조에서 일을 맡으니 그 관직이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치우(治尤=蚩尤)[주:蚩尤-배달나라 제14세 자오지(慈烏支)환웅, 재위 109년 수는 151세]는 이마가 쇠처럼 강하고 능히 크게 안개도 일으켰다. 그 때에 자부선생 밑에서 함께 공부하던 중화의 황제(黃帝)가 공연이 염제(炎帝)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황제와 탁록(涿鹿)[주:涿鹿-중국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顯)에 있다] 들에서 싸웠는데, 후원병이 오지않아 황제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 특명(特明)이 또한 매우 용맹하여, 단조에서의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고, 상균(尙均)과 더불어 단조를 도우니 정치의 문명(文明)정도가 중화의 우조(禹朝)보다 훨씬 뛰어났다.
임금께서 태자되었을 때에 중화의 백우(伯禹)와 더불어 친선하다가,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니, 우도 순의 자리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 때에 홍수가 9년동안 천하에 범람하여 중화는 우가 치수(治水)하는데 곤란을 겪고, 조선은 팽오(彭吳)에게 치수를 맡겨 치수가 완료되니, 우(禹)가 도산회의(塗山會議)[주:塗山會議-큰 홍수가 있어 우리는 치수(治水)를 잘 하였으나 중국은 큰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도산(塗山-중국 상해 남쪽 절강성에 있다)에서 주변 나라들이 모였는데, 우리는 오행 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 주었다. 이로써 우(禹)는 물을 잘 다스리게 되어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를 각 나라에 요청하였다. 임금께서는 팽오를 특명대사로 삼아 우에게 보내어 치수하는 법을 설명하셨다.
3년 9월에 조서를 내리시어, 백성들에게 머리를 땋고 푸른옷(靑衣)을 입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며, 예의를 숭상하게 하여 어진 행정을 하였다.
10년 4월에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니, 백성은 사전(私田)이 없었다.
18년 6월에 조서를 내리시어 충의열사(忠義烈士)와 효자열부(孝子烈婦)와 현자(賢者)의 행실을 포상하였다.
아들이 16명이 있었는데, 맏아들 가륵(嘉勒)으로 태자를 삼고, 그 밖에 15명 중 봉건국(封建國)을 얻은 자가 8명이며 나머지는 다 친왕(親王)이 되었다.
이 때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그 수가 많았다. 국경은 동쪽이 창해(滄海), 서쪽은 요서(遼西), 남쪽은 남해, 북쪽은 서비로(西非路)[주:西非路-서백리아(西伯利亞), 곧 시베리아를 말함]에 이르러, 큰 민족이 9부(九部)[주:九部-구이(九夷), 곧 우리의 아홉족속을 말함], 작은 민족이 14부였다.
모두 단군의 덕화(德化)를 입어 위로는 인륜(人倫)이 밝고 아래는 교화(敎化)가 행하여져, 풍속의 선하고 아름다움이 천하에서 제일이었다.
26년에 석자장(石子丈)이 아뢰기를 환국의 “시조 여왜(女媧)하느님께서 지은 천부경(天符經)
[天符經]-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鉅無匱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
衍萬往萬來用變不動
本本心本太陽昻明人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을 참고하여 보면, 여왜(女媧)하느님이 만물을 지어 그 모양과 색깔이 가지가지이나 각각 그 시작이 있는 것은, 그 중에 한 가지의 영(靈)을 포함했기 때문이니, 이것이 일시무시(一始無始)인데, 일(一)이 무시(無始)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에 무시(無始)로부터 먼저 이수(理數)가 있어, 일양(一陽)과 이음(二陰)이 도(道)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物質)의 도(道)입니다.
태극(太極) 이상(以上)의 것을 말하면, 이 도(道)는 이(理)와 기(氣)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신(神)의 오묘함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 도(道)에서 나왔고 또 도에 들어가니, 도의 근원은 하늘(天)에서 나왔고, 사람의 근원은 신조(神祖:여호와 하느님)에서 나왔으니, 하느님과 신조(神祖)는 그 사이가 밀접하여 하느님이 곧 신조입니다. 바라옵기는, [여왜(女媧)하느님을 모시는 신사신전(神社神殿)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경건하고 사모하게 하므로 신앙(信仰)하게 하여 만고(萬古)의 기본을 잊지 않는 도(道)를 삼으소서.”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겠다 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女媧)하느님을 숭배하는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위(三神位)를 봉안(奉安)하여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38년에 나함연(邏閻蓮)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해에 남함지(南閻地)에 건너가서 범경빈(梵經賓)을 만나 말을 들으니 이 쪽은 고해(苦海) 저 쪽은 극락(極樂)인데, 고해에서 극락에 가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업혹계(業惑界)를 해탈(解脫)한 후에야 거기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이런 도(道)를 알지 못하면 공연히 어지러운 생각과 망상이 일어난다 합니다.
대개 모든 형상이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어,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고 탐하는 것과 눈을 부릅뜸과 어리석음도 없으며, 색(色)과 소리(聲)와 향기(香)와 맛(味)과 찔림(觸)과 느낌(感)의 육욕(六慾)도 없고, 태어나고 늙고 병에 걸려 죽는 사고(四苦)를 해탈하면, 이것이 더없는 올바른 깨달음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가만히 거듭 생각해 보니 이것은 진실한 공부인데, 마음이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치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남함지(南閻地)의 성인(聖人)이 있는데 이 말을 지은 듯 하오니, 원하옵기는, 전하께서 사자를 남함지에 보내시어 그 도덕과 정치를 시찰하고 와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은 본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데 시행한다면, 나라가 문명하고 진보하는 데 좋은 길이 될까 합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사람의 도(道)에 있어서의 진리는 하나이며, 두 점 간의 직선도 하나이다. 그 나라와 민족은 서로 달라도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바른 도리는 하나이다.
내가 일찍이 선제(先帝)에게 지켜야 될 바를 물으니, 생각이 맑고(惟精) 오직 하나 (唯一)가 되어 그 중추(中樞)를 잡아야 하는 것은 바른 것(正)을 잃(矢)지 않는 것이라 하셨는데, 하필이면 다른 나라의 도덕과 정치를 빌리겠는가. 새와 짐승은 땅에 살고 고기는 물에서 사는 것이니, 물고기를 육지로 옮겨 놓으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를 본받고자 하면 반드시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리라.”하시니, 모든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니 백성들이 슬피울었다.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고 누런 안개(黃霧)가 사방에 끼어 짐승 떼가 산꼭대기에서 어지러이 울부짖으니, 하늘과 사람과 만물이 함께 슬퍼한다 하였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3세 단제이시다.
제 3 세 가륵(嘉勒)
―4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오사구(烏斯丘)를 태자로 삼고, 아우 가록(嘉祿)을 사달(斯達=阿斯達)왕으로 삼고 서울을 구월산(九月山) 당장경(唐藏京)에 정했다.
2년 봄에 을보륵(乙普勒)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주:國文正音-고대로부터 우리 겨레가 써오던 글인데 이를 가림토(加臨土)라고도 한다. 이것이 한글의 전신이다. 훈민정음 서문에 보면 한글의 모양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고 전하고 있다]을 정선(精選)하도록 하였다. (白岳馬韓村에 古碑文이 있다.)
3년 가을에 태수관(太修官) 고설(高契)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하니 이것이 동양사학(東洋史學)의 원조(元祖)로서, 신계성훈(神誡聖訓)과 칙교유서(勅敎諭書)와 도덕 정치 법률 풍속 등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野勃이 滿文으로도 간행하였다.)
6년에 태학태사(太學太士) 고신(高辛)이 부모의 3년상(三年喪)을 지내겟다고 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 하셨다.
애묘(愛苗)씨가 무도(無道)하여 임금께서 실단(悉段)에서 그를 토벌했다.
요동태수(遼東太守) 색정(索靖)의 치적(治積)이 덕스럽지 못하므로,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색정을 약수(弱水=黑水)로 유배시켰더니 나중에 흉노족(匈奴族)[주:匈奴族-몽고지방에서 활약하던 북적(北狄)의 일파인 유목민족]이 되었다.
7년 초에 임금께서 조서를 내리기를 “천하에서 가장 으뜸가는 근본은 마음이 중정(中正)[주:中正-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 바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적당한 정도]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중정(中正)을 잃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물건이 중정(中正)을 잃으면 형태가 흐트러진다. 인심(人心)은 위험하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마음을 정하게 가져 진실로 그 중추(中樞)를 잡아 중정(正中)을 잃지 말라. 중정이 된 후에야 만사를 바르게 하느니라.
중정의 도(道)는, 아버지는 마땅히 자비하며 자식은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은 마땅히 사랑하며 신하는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며, 아이들은 마땅히 어른을 공경하며, 친구는 마땅히 신의가 있어야 하며, 몸가짐은 공손하고 검소하여야 하며, 사랑으로 무리를 맞으며, 학문을 닦으며 업(業)을 단련하여 지능을 계발하며, 덕행과 기량을 키워 공익(公益)을 넓히며, 세무(世務)를 풀어나가며, 항상 나라의 방침(國是)을 존중하여 국법을 준수하고, 각각 맡은 일을 지켜 증산(增産)에 힘쓰다가 만약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사사로운 일을 버리고 공(公)을 생각하며, 위험한데라도 용감히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붙들어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나와 모든 신민(臣民)들이 함께 마음에 두고 정성스럽게 지켜, 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일체(一體)가 되어 지극히 높은 뜻을 실천하리라.”하셨다.
8년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지백특(支伯特)[주:支伯特-티베트]에서 토벌하여 평정하셨다.
13년 봄에 임금께서 이르기를 “화창한 이 봄에 만물이 다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는데, 내 백성 중에 고독한 홀아비와 과부, 그리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항상 비애와 우수(憂愁)에 젖어 눈썹을 펴고 웃어 볼 날이 없으니,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하시고,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여 불쌍히 여겨 도우니, 중화(中華)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백성되기를 원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해 여름에 임금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오르시어 민가를 바라보니, 밥 짓는 연기가 적게 나는 것을 보시고, 세금의 반을 감하셨다.
그 다음 해에 다시 산에 오르시어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20년에 임금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창해(滄海)에 이르러 산천을 바라보시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산하(山河)의 수려(秀麗)함이여, 내가 장차 동방에 도읍을 옮기리라.”하셨다. 천하를 다스리신 지 45년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의 살림은 안락하니, 이 때가 3세 단제가 다스리던 시대다.
45년 9월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4세 단제시다.
제 4 세 오사구(烏斯丘)
―3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蒙古里) 왕으로 삼으니, 그 자손이 몽고족이 되었다.
그 해 가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입조(入朝)하였다.
2년 봄에 하(夏)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5년에 원공패전(圓孔貝錢)
[주:圓孔貝錢-조개로 둥글게 만들고 가운데 구멍뚫린 돈]을 만들었다.
7년에 조선공장(造船工場)을 살수(薩水) 상류에 세웠다.
10년 봄에 궁전을 크게 세워 건청궁(乾淸宮)이라 하였다. 25년만에 건청궁을 완성하니, 동서가 600간(間), 남북이 100간, 위층은 만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은 네 길 낚싯대를 세울만 하였다.
20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쌓았다. 소나벌(蘇奈伐)이 진언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나라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병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요긴한 일이니, 문무(文武)를 함께 쓰는 일은 나라를 장구하게 보전하는 방법입니다. 나라가 비록 커도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고,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위태롭게 됩니다.
옛날 성제명왕(聖帝明王)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道)은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푸는데 있다 하셨으니, 사람을 죽여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고, 나라를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문(文)만으로 다스려 은혜만 베풀면, 이것은 냄새나는 고기에 파리가 모여드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정치가 부패하게 되고, 무(武)로써 위엄만으로 다스리면 찬서리가 땅을 덮는 것과 같아서 정치기능에 활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봄에 나고 가을에는 죽는 계절의 변화 과정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또 낮과 밤이 바뀌는 이치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바라옵기는, 전하께서 구정(舊政)을 혁신하시어 군기(軍紀)를 숙청하시며, 백성의 뜻을 독려하시어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어 만대(萬代)를 이어 쇠약하지 않는 신성국(神聖國:성스러운 여왜(女媧)하느님이 만드신 나라)을 만드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받아들이고 소나벌(蘇奈伐)을 상장(上將)으로 삼고 방민백(方民伯)을 태재(太宰)로 삼았다.
38년 6월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5세 단제시다.
제 5 세 구을(丘乙)
―16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삼고, 아우 삼인(三人)을 번왕(藩王)에 봉하였다.
2년 여름에 밭과 들에 황충(蝗虫)이 크게 번져, 임금께서 친히 밭과 들에 나가 황충 한 마리를 삼키시고, 하느님께 황충을 멸하여 주기를 아뢰니, 며칠만에 황충이 다 없어졌다.
4년 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왔다. 유웅(有應)씨가 무도(無道)하여 소나벌(蘇奈伐)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5년 봄에 하(夏) 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曆書)와 두건갑자기(斗健甲子記)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왔다.
8년 여름에 신독(身毒)[주:身毒-인도]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빈(東海濱)에 닿았다.
9년 가을에 접빈관(接賓館)을 동문밖에 지었다.
10년에 모든 곡식이 흉작이 들어 큰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3년에 감성관(監星官)에게 혼천기(渾天機)를 만들게 하여 천도(天度)와 합하게 하였다.
15년에 감성관 황포덕(皇甫德)이 임금께 아뢰기를 “제가 천문(天文)을 관측한 지 50년이 되므로 천체의 대강을 추측하였습니다. 천체 중에 제일 큰 것은 북극성같은 항성(恒星)입니다.
그 다음은 태양의 종류이며, 다음은 수성 금성 지구성(地球星) 화성 목성 토성 천명성(天明星) 해명은성(海明隱星) 명성(明星)같은 행성이 있어 태양을 중추(中樞)로 삼아 회전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역시 태양계의 하나인 행성입니다.
해는 땅의 온도를 조화(調和)하여 만물의 생장(生長)을 돕는 것이며, 지구의 외각에는 붉은 막이 포위하고 있어, 지면의 각종 기체를 보전함으로써 기체가 발산하지 못하고, 그 범위 안에 있어 태양의 뜨거운 빛을 받아 바람과 구름도 되고, 우박도 되고 번개도 되고, 서리나 눈도 되어, 사계절이 서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면에 사는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으니,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헤아리지 못하면 음양(陰陽)을 따라 사시(四時)를 좇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음양을 따라 사시를 좇지 못하면, 백성이 농사 절기를 맞추지 못하여 수확이 없어 농민이 굶게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역법(曆法)을 정하시어 우리나라 기후에 맞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 줄로 압니다.“하였다.
임금께서 그렇다 하시고 국역(國曆)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조선역서(朝鮮曆書)의 시작이다.
16년에 임금께서 고역산(古曆山)에 행차하시어 제천단(祭天壇)을 쌓으시며 주변에 근수(槿樹)[주:槿樹-무궁화나무]를 많이 심고, 7월에 임금께서 비류강(沸流江)을 지나 강동(江東)에서 승하하시니 거기에 장사하였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6세 단제시다.
제 6 세 달문(達門)
―36년간 재위―
6년에 맏아들 한속(翰粟)을 태자로 삼고, 을지선(乙支仙)을 수재(首宰)로 삼고 연석천(淵石泉)을 상장(上將)으로 삼았으며, 진무경(陳無競)을 섭사직(攝司職)으로 삼고 관기을(關基乙)은 숙정사(肅政使)로 삼았다.
임금께서 남쪽 황산곡(黃山谷)에 행차하시어, 두 손을 묶인 죄인을 보시고 차에서 내려 울며 묻기를 “네가 무슨 일로 범죄 하였느냐. 죄를 지었구나. 천하에 죄인이 많구나. 나라가 시작될 때의 삼성시대(三聖時代) 백성들은 삼성(三聖)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더니, 내가 임금이 되어서는 백성들이 각자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니, 내가 슬퍼하노라. 대개 백성은 사리가 부족하면 거짓을 하게 되고, 힘이 부족하면 속이고, 재물이 부족하면 도적을 하게 되니, 백성의 주인된 자가 백성을 이런 불안한 처지에 있게 하고 어찌 하루인들 마음을 놓고 편안히 누울 수 있겠느냐.”하셨다.
마서자(麻西子)는 음탕한 사람이다. 하루는 맛이 좋은 술을 구하여 진상하니, 임금께서 마시고 달다 하시며 “이것은 성품을 상하게 하여 미치게 만드는 약이니, 후세에는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며 패가(敗家)하는 자 많으리라.”하시고 드디어 마서자(麻西子)를 끊으셨다.
7년에 천리마(千里馬)를 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천자(天子)의 다니는 길은 일정하니, 경사스러운 일에는 하루에 40리, 사사로운 일에는 하루에 50리라. 국기(國旗)는 앞에 있고 따르는 자는 뒤에 있어 혼자서 다닐 수 없으니, 내가 천리마를 타고 홀로 먼저 어디에 가겠는가.”하시고 이르기를 “나에게 헌납하는 말을 받지 않는 것은, 사방 어디에서든지 와서 바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하셨다.
8년에 갈모후(曷毛候)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군사를 보내어 잠잠하게 하였다.
10년 가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조정에 왔다.
11년에 팔부루(八夫婁)가 임금께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은, 먼저 자기의 명덕(明德)을 밝게 하는데 있고, 다음은 백성을 몸소 사랑하여야 하고, 마지막은 지극한 선(善)에 이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대개 사람의 지능은 먼저 그 물정(物情)과 물리(物理)를 알아야 점점 발달하게 되는 것이며, 만물의 사정과 이치를 안다는 것은 백성의 일상 생활에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갈포(葛布)를 입고, 겨울에는 털옷을 입는 것은 기후의 춥고 더움을 좇아 입는 것이며, 생선과 고기를 먹는 것은 먹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겨, 몸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수신(修身)하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입니다. 또 언제든지 전쟁에 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며, 지키는 자기를 높고 견고한 성과 같이 하여야 하고, 공격하는 태세를 갖춘 자기를 용맹스러운 장수와 병사같이 하여야 합니다.
유혹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물리쳐야 하며, 게으름이 들어올 때는 분발(奮發)시키며, 일생(一生)을 위해서는 많고 위험한 고비를 무릅쓰며, 공을 세우기 위하여 험한 고비도 넘으며, 승패의 갈림길에서는 잠시라도 힘을 늦춰서는 안되며, 허실(虛實)의 원인과 결과는 티끌만한 태만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일초일각인들 방심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지식과 행함은 견고한 병기로 무장된 병사처럼 되지 않으면 안되며, 의(意)와 지(志)가 강한 활과 살처럼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력(實力)과 군량(軍糧)은 늘 풍족하게 하고, 병사들은 항상 용맹스럽게 하며, 지능있는 모사(謀士)는 본거지 안에서 꾀를 내며, 자격있는 주장(主將)은 진문(陳門)안에서 지휘하여 의용(義勇)을 떨치면 무력의 위엄이 적에게 미칠 것입니다.
전쟁에서 모실 자는 모시고 징벌할 자는 징벌하는 것은, 그 목적이 개선(凱旋)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 대의 힘을 과시하여 기운을 토해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최후의 승리는 오직 하나의 방법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 덧없는 승패는 도외시하고 마지막까지 승전하고야 마는 칠전팔기(七顚八起)며, 구사일생(九死一生)할 각오로써 홀로 자아(自我)의 신념을 확신(確信)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인내(忍耐)입니다.
이 인내력이 있으면 어떤 위험이 있어도 근심할 것이 없으니 무슨 곤란(困難)이 있겠습니까. 넘어져도 희망은 항상 있으며, 맹렬한 폭발 속에서도 뜻은 매우 높으며, 마음이 만고청산(萬古靑山)과 같고, 움직임은 만리장강(萬里長江)과 같아서, 반드시 계획한 것은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수신(修身)의 도(道)를 제대로 알고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 팔부루(八夫婁)여,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부리는 도(道)를 수신(修身)하는 데서 얻었다.”하시고, 그를 상장(上將)으로 삼고 삼군(三軍)을 독려하게 하였다.
35년에 임금께서 열국의 왕후(王侯)를 상춘(常春)[주:常春-장춘(長春)]에 모이게 하니, 큰 나라가 둘, 작은 나라가 스물, 추장(酋長)이 360이나 되었다.
3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7세 단제시다.
제 7 세 한속(翰粟)
―54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우서한(于西翰)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궁성(宮城)의 동쪽에서 좋은 샘(甘泉)이 솟아났다.
10년에 방사(方士)[주: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윤파로(尹巴老)가 신선술(神仙術)을 말하니, 임금께서 믿지 않으시고 이르기를 “이난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다 요사스럽고 세상을 속이는 일이니 감히 군자(君子)의 도(道)와 함께 있을 수 없다.”하시고 방사를 멀리 하니, 해외(海外)의 요괴(妖怪)한 술사들이 다시는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25년에 주부(主父) 온백(溫伯)이 임금을 달래며 말하기를 “지금 하(夏) 나라 정법(政法)이 어두워 국세는 위축되고 백성은 가난하며, 군사는 약하여 외적의 침입이 쉬지 않는 이 때에, 천제(天帝)의 나라는 부하고 군사가 강하니, 한번 군사를 움직여 공격하면 하나라를 손아귀에 넣기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잃지 마시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공연히 남의 나라를 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며, 또 영토를 얻기 위하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니, 나는 받아들일 수 없노라.”하셨다. 하 나라 왕이 이 일을 전해듣고 사자를 보내와 사례하였다.
26년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48년에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반을 감해 주었다.
5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8세 단제시다.
제 8 세 우서한(于西翰)
―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아술(阿述)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이삭이 여덟개 달린 벼가 있었다. 임금께서 태자로 있을 때부터 웅대한 배포와 큰 도략이 있었으며, 거기에 덕행까지 겸하여 백성들의 앙망을 크게 받더니, 보위에 올라 나라를 선하게 다스리시며, 인재를 등용하고 장병들을 훈련하니, 내심으로는 천하를 통일할 뜻이 있었다.
3년에 달돌(達突) 나라 사절이 입조(入朝)했다.
4년에 임금께서 일부러 보통사람과 같은 옷(微服)을 입으시고, 하(夏) 나라에 들어가 지리와 정치와 인정(人情)과 풍속을 살피시고 반년만에 귀국하여 관처의 제도를 크게 고쳤다.
6년에 지우속(支于粟)을 상장(上將)으로 삼고, 오간(烏干)을 태재(太宰)로 삼았다.
7년에 세발달린새(三足烏)가 궁중으로 날아드니, 날개 너비가 석자(三尺)나 되었다.
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9세 단제시다.
제 9 세 아술(阿述)
―3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노을(魯乙)을 태자로 삼고, 그 해 봄에 두 개의 해(兩日)가 함께 나타나(並出)는 듯하였다.
2년 여름에 청해후(靑海候) 간촉(干促)이 군사를 일으켜 성에 들어가 궁궐을 포위하니, 임금께서는 상춘(常春=長春)으로 피난하시고, 상장 지간속(支干粟)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치니, 7월에 임금께서 다시 궁으로 돌아오셨다.
3년에 임금께서 북쪽(朔方)에 행차하시어 민정을 살피셨다.
5년에 고소(高蘇)에게 명을 내려, 국법전서(國法全書)를 다시 편찬하였다.
6년 봄에 을성문덕(乙成文德)이 아뢰기를 “국가는 모든 백성의 국가이며, 임금 한 분의 사유가 아니므로 임금과 신하가 합의하여 국사(國事)를 정하는 것입니다. 매년 부(府)와 군(郡)의 대표가 의사원(議事院)에 모여 국사를 의논하여 결정한 후에, 천제(天帝:여왜 하느님)의 허락을 얻어 정부의 책임자로 하여금 실행하게 하면 임금과 백성이 합의하는 정치가 되는 것이니, 바라옵기는, 회기(會期)를 정하시어 백성에게 참정권(參政權)을 허락하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허락하시고 매년 8월 1일 정기회의 날짜로 삼으니, 민권(民權)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0세 단제시다.
제 10 세 노을(魯乙)
―5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도해(道奚)를 태자로 삼고, 혁보(赫普)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풍오(風五)는 수상(首相)으로 삼고 을성문덕(乙成文德)은 상장으로 삼고, 용가래량(龍加來良)은 호군(護軍)으로 삼았다. 이아한(伊阿漢)이 아뢰기를 “임금께서 부리지 않는 신하가 있어야하니, 의논하고자 하시면 친히 찾아 물으시어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사(政事)의 최고자문처(最高諮問處)입니다. 바라옵기는, 전하께서 마땅히 설치하시옵소서.:”임금께서 그 말을 따라 자문기관을 만들었다.
2년에 이아한(伊阿漢)을 숙정처장(肅政處長)으로 삼아 고시(考試)로 인재를 뽑았다.
5년에 각도의 고을(首府)에 신원함(伸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으로 하여금 이 함에 신원서를 넣어 억울함을 풀게 하였다.
10년에 엄년(嚴年)이 쳐들어오니, 지간속(支干粟)을 보내어 물리쳤다.
16년에 동문(東門)밖의 육지에서 연(連)이 나고, 장백산(長白山)에서는 누운 돌이 일어나고, 발해(渤海)에 용귀(龍龜)가 나타나고, 흑수(黑水) 강가에 금괴(金塊)가 노출되니 그 수량이 열한섬(石)이나 되었다.
58년에 천문대(天文臺)를 쌓고 감성관(監星官)을 두었다. 이 해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1세 단제시다.
제 11 세 도해(道奚)
―5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아한(阿漢)을 태자로 삼고, 유위자(有爲子)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유위자(有爲子)가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여왜(女媧)하느님이 개국하신 천제국(天帝國)으로서 신조(神組:여왜(女媧)하느님)께서 종교를 창립하여 국교(國敎)로 삼으시고 백성들이 다 숭배하며 우러러 믿었으나, 세월이 가고 사람도 가니, 경(經)이 쇠잔해지고 종교(敎)가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이 여왜(女媧)하느님께서 창시하신 신교(信敎)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형식에 흘러 음탕한 짓을 마음대로 하며 미신(迷信)에 빠져, 그 해로운 영향이 국정(國政)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전하께서는 종교를 혁신하시어 다시 본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종교를 진실하게 믿고 음란하고 겉치레를 일삼는 재앙에 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따라 종교를 크게 혁신하고 신앙을 바로 잡아 다시 성실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이 때가 종교의 중흥시대가 되었다. (渤海때에는 三一神誥를 많이 발행하였다.)
8년 여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입조(入朝)하였다.
10년에 금강율령(金剛律令)을 선포하였다.
36년에 신우(神佑)를 하(夏) 나라에 보내어 두 나라의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38년에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를 평양에서 크게 개최하니 여러 나라(列國)의 진귀한 물품이 몰려들어 산해(山海)같이 진열되었다.
48년에 조서를 내려, 백성된 자는 다 병역(兵役)에 종사하게 하고, 백성이 다 군사되는 법을 세우시고, 유학생 25명을 하(夏) 나라에 보내어 하서(夏書)를 공부하라 하셨다.
56년에 기계공창(機械工廠)을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설치하고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는데, 나라 안에 현상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자는 각각 상을 받게 하였다. 상을 받게된 새로운 발명품은 다음과 같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차(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뇌차(自發雷車)
천문경(天文鏡)
조담경(照膽鏡)
구석편(驅石鞭)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
연적(涓滴)
발뇌동용기(發雷動舂機)
소금(素琴)
천리상응기(千里相應器)
목류마(木流馬)
진천뢰(震天雷)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측천기(測天機)
양해기(量海機)
양청계(量晴計)
측우기(測雨機)
측한계(測寒計)
측서계(測暑計)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이런 것들이 발명되어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다.
(居漆夫小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니, 백성이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천하가 음악을 그쳤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2세 단제시다.
제 12 세 아한(阿漢)
―52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흘달(屹達)을 태자로 삼고, 둘째 아들을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다.
2년 여름에 발이 하나인 짐승(一足獸)이 송화강(松花江)가에 와서 놀며 슬피울었는데,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묻기를 “이것은 알지 못하는 짐승인데 발 하나로 뛰어다니며 슬피우는구나.”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좋은 징조가 잇고,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서 신물(神物)에 나타나며 사체(事體)에 움직이고, 화와 복이 장차 이르게 되면 착한 것도 알게 되며 착하지 못한 것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은 천지조화의 징조입니다.
이 짐승은 하 나라 남쪽의 양수(陽獸)인데 신명(神明)한 물건입니다. 하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그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다만 이 짐승만 보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천도(天道)의 운행을 살피면 만세(萬世)의 일도 능히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하(夏)나라를 대신하여 천자(天子)될 사람이 누구냐.”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하 나라의 인물을 살피니 하 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고,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천을(天乙)이라는 사람이 잇습니다.
그는 어진 보좌관(賢佐)인 이윤(伊尹)을 얻어 덕행(德行)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높아졌으니 하 나라를 쳐서 천자가 된다면 그 자손이 600여년은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다.” 임금께서 “그 다음은 누구냐.”하시니, 유위자 아뢰기를 “서이(西夷)에 성인(聖人)이 나서 덕을 닦고 은혜를 베풀면 민심이 다시 돌아와 그 어진 분의 보필이 생기게 될 것이니, 그 자손이 왕위를 게승한다면 800년은 이어갈 것입니다.”
임금께서 “내 후손의 성쇠(盛衰) 시기는 과연 어느 때인지 그 대략을 묻노라.”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국가성쇠(國家成衰)의 운수는 하늘이 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시어 덕이 만방에 넘치니, 나라의 문명(文明)정도가 중화(中華)를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중화가 은조(殷朝)에 이르러서는 예악법도(禮樂法度)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성현(聖賢)이 배출되어 경전(經傳)[주:經傳-성경현전(聖經賢傳)]을 저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여러 학자들이 각각 그 이상(理想)을 말하리니, 문화의 향상이 전무후무하여 천하를 휩쓸 것이므로, 만국이 그 문화를 암오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한학(漢學) 전성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전하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이 혹 북방에서 터를 보전하며, 혹 동방으로 도읍을 옮기며 혹 남방에서 건국하는 자가 있겠으나, 큰 자는 땅이 수천리 될 것이며 작은 자는 수 백리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후손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상대를 침략하는 전쟁만 일삼고, 문화는 점점 퇴보하여 조국문자(祖國文字)[주:祖國文字-옛 우리 글이 있었음. 한글의 전신. 제3세 단군 가륵(嘉勒)임금이 을보륵(乙普勒) 박사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었다. 이문자는 동북아시아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어 왔다. 천부경 삼일신고등도 원래는 이글로 쓰여졌으며 지금은 이를 다시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돌보지 않고, 모화사상(慕華思想)[주:慕華思想-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숭모하는 사상]이 날로 높아져 수천년 후에는 모화(慕華)하여 유학(儒學)에 미친 사람이 나라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자(文字)는 다 없애고 한문자(漢文字)만 정용(專用)할 것이며, 한문으로써 우리나라 국명(國名)과 왕호(王號)와 관명(官名)과 지명(地名)과 모든 물건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며, 이름까지 중화 사람의 이름과 같아 우리를 중화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그 선조(先祖)를 잃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심히 원통한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어 뒷 일을 미리준비하시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신인(神人)이로다. 능히 반만년 후의 일을 추측하도다.”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비석을 나라의 사방 경계에 세우고, 그 비면(碑面)에 우리나라 문자로 제왕(帝王)의 이름을 새겨, 영원히 국문(國文)을 보전하라 하셨다.
구월산(九月山) 마한촌(馬韓村)에 옛 글자로 된 비석이 하나 있어 범문(梵文)과 비슷한데, 후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마을 이름은 ‘마한’이라 하는데
특별히 구별되는 이상한 돌이 있네.
대(臺)는 거칠고 철죽은 붉게 폈는데
글자는 파묻히고 이끼만 푸르구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서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세우기를 다 하였네.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으나
이것이 기(奇)씨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村名稱馬韓하니 別有殊常石이라
臺荒躑躅紅이오 字沒苺苔碧이라
生於剖判初하여 立了興亡夕이라
文獻俱無徵하니 倘非奇氏跡이라
장백산(長白山) 안흥령(安興嶺)에도 옛 비석이 있다.
5년 봄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착하며, 곧고 바르며, 윗사람에게 끝까지 바른 말을 서슴치 않는 서니를 등용하였다.
10년에 개기파(開基波)를 수상(首相)으로 삼고, 마간득(馬干得)을 상장(上將)으로 삼았으며, 홍경(弘景)을 간관(諫官)으로 삼았다.
11년에 임금께서 더욱 국정을 밝게 살피실 때에 조회(朝會)를 피하시고 간관(諫官) 홍경(弘景)에게 물으시기를 “나는 어떠한 임금인가.”하시니, 홍경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질지 못한 임금입니다.”하니, 임금께서는 “무슨 일로 내가 어질지 못한가.”하시니, 홍경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친아우를 봉하지 않으시고, 맏아들을 봉하였으니 어찌 어진 임금이 되겠습니까.”했다.
임금께서 기뻐하지 않다가, 홍경이 나가고 유위자(有爲子)가 들어왔는데 임금께서 또 묻기를 “나는 어떤 임금인가.”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어진 임금입니다.”했다. 임금께서 “무엇으로 나의 어짐을 아는가.”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제가 묻사오니 임금이 어질면 신하도 바르다 하였는데, 아까 홍경의 말이 바르니 이것으로 아나이다.”했다.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어, 홍경을 불러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이때부터 바른 말을 서슴치 않는(極諫) 선비가 많이 나왔다.
22년 용가래량(龍加來良)을 보내어 하걸(夏桀)을 도와 은탕(殷湯)을 치다가 탕(湯)이 사죄하니, 용가래량이 회군(回軍)할 때에 염이(厭夷=九夷의 한 족속) 때문에 관중향서기주(關中鄕西岐周=岐山)에 살았다.
29년에 처음으로 청아대부(菁莪大夫) 한불배(韓不倍)와 옥저대부(沃沮大夫) 고사심(高士深)과 맥대부(貊大夫) 신돌개(申突盖)에게 명하여 제후(諸侯)로 삼아 토지를 주니, 이것이 마한(馬韓=莫)과 진한(辰韓=眞)과 변한(弁韓=番)이 되었다.
30년에 유위자(有爲子)를 국태사(國太師)로 삼고, 태학관(太學舘)을 세워 어진 선비를 양성하였다.
36년에 사람이 중화로부터 들어와, 하(夏) 나라 임금이 무도(無道)하여 스스로 망할 것을 전하니, 임금께서 “하 나라가 망할 것을 나도 이미 알았노라.”하셨는데, 몇 해 못가서 과연 상탕(商湯)에게 망하였다.
38년에 임금께서 하걸(夏桀)이 포악하고 무도하여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보시고, 더욱 근면하여 국정을 바로 살피시며 백성을 사랑하시니, 나라 안이 잘 다스려져, 하 나라 신하와 백성으로, 상 나라 조정의 신하되기를 마다하는 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임금께서 불쌍히 여겨 후하게 사랑하셨다.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에게 배워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다. 이 사람이 상탕(商湯)의 재상이 되어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니, 유위자가 듣고 “이것도 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따르는 일이나, 이윤(伊尹)이 아니면 할 수 없다”하였다.
52년에 상(商) 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했다.
7월에 임금께서 승하하시니, 모든 백성이 부모의 상을 다한 것 같이 울었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3세 단제시다.
제 13 세 흘달(屹達)
―61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고불(古弗)을 태자로 삼았다. 하 나라 신하인 한작(寒爵)이 고국을 회복하고자 하여 군사를 요청하니, 임금께서는 “이것도 하늘의 뜻이니 사람의 힘으로 할 일이 아니라.”하셨다.
3년에 상(商)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통상(修好通常)을 맺었다.
7년에 양무(陽武)를 수상(首相)으로 삼고, 단성자(段成子)를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16년에 조서를 내려 지방자치제(지방자치제)를 실시하였는데, 관리를 나누어 입법 사법 행정을 맡아 각각 그 직책을 지키게 하고 겸직하는 고달픈 직책도 없고, 월권하는 등 함부로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없게 하라 하셨다.
20년에 법정학교(法政學校)를 세워, 법정(法政)으로써 백성을 가르쳤다.
26년에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묻기를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선생은 나를 위하여 설명하기를 원하노라" 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도(道)는 상대(對)가 없으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 도(道)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道)를 도(道)라 하면 정상적인 도(道)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정상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천지가 큰 것에서부터 하나의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다 그 도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는 천지의 도가 있고, 인생은 인륜(人倫)의 도가 있고, 만물은 만물의 도가 있고, 각종 업무에도 다 그 도가 있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형(無形)하고 유실(有實)하게 도를 이룬 자는 신(神)이니, 보아도 볼 수 없으며,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고, 사물의 형체로 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비록 크나 그 안에서 떠나지 못하고, 짐승의 털이 비록 작으나 능히 대도(大道)를 담을 수 있으며, 밝은 것은 어두운데서 형태가 생겨나고, 형태가 있는 것은 형태가 없는데서 생겨납니다. 정신은 도(道)에서 생기고, 형체의 근본은 정(精)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이 형상(形狀)으로 서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아홉 구멍(九穴)이 있는 것은 태로 낳는(胎生) 것이며, 여덟 구멍(八穴)은 알로 낳는(卵生) 것이고, 일곱 구멍(七穴)은 부화하여 나오는(孵生)것이며, 세포공(細胞孔)이 많은 것은 심어서 나는(植生)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있기는 하나, 온 자국(趾象)은 없고 그것이 갈때에는 없어져 가는 형질(잔질=殘質)이라도 남아 있으나, 정한 곳(定涯)이 없어 출입하는데 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 안에 충만한 것은 일진기(一眞氣)입니다.
우주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과 영원무궁(無始無終)한 시간을 이르는 것이니, 진기(眞氣)가 공간에 충만하여 항상 보편운동(普遍運動)이 있어 영구히 윤회상(輪回狀)을 지어냅니다.
그러나 혹은 일정한 진화(進化)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데, 그 진화의 상태는 늘 그 밀도(密度) 변화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밀도는 계량(計量)할 것도 있고 계량 못랄 것도 있어, 이 두 가지는 엄연히 구별되어 각각 무한한 소소체(小素體)를 만들어 내는데, 이 소소체는 수 없는 응집중심(凝集中心)을 거쳐서 실체(實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는 감성(感性)과 경향(傾向)이 또한 하나의 원인이 되어, 이렇게 미소(微小)한 실체(實體)가 점점 모여서 큰 것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그 응집의 경로를 거쳐 마침내 한 쪽의 형체를 이루니, 다른 쪽이
그 반동력(反動力)으로 중간에 반드시 계량을 할 실질적인 긴장세력(緊張勢力)을 일으킵니다.
이 때에 우주의 모든 물체가 서로 충동(衝動)함으로 파괴하여, 능히 고도의 회전력이 생겨 대기(大氣)를 운동하게 하고, 기계적 충돌원인에 의하여 고도의 열(熱)을 내기 때문에, 반드시 신진운동(新振運動)의 세력(勢力)이 생겨나 성운(星雲)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성운은 곧 태양과 만물의 본체이므로, 스스로 원심(遠心)과 근심(近心)의 서로 끄는 작용으로써, 혹은 집중하여 혹은 분산하여 나선형(螺旋形) 타원형(橢圓形) 환형(環形)을 이루고, 다시 집중작용으로써 끝내는 구형(球形) 혹은 성군(星群)을 이루니, 그 집단의 성원(成員)은 몇 개 혹은 몇 백 몇 천입니다. 이것이 천체 중의 태양계입니다.
태양계의 물체는 집중작용에 의하여 분형상태(分形狀態)로 되어, 널리 두루 구형(球形)으로 된 기체(氣體)중에 포함된 분자(分子)가 운동력 분산으로써 내부와 외부 사이에 점점 차고 더운 온도의 차이가 생기며, 때때로 환형(環形)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한 물체를 이룹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분화작용(分化作用)을 하여 점점 같은 온도와 같은 종류를 합하여 커져서 꼴을 이루니, 이것이 항성(恒星)과 태양과 혹성(惑星)과 중성(衆星)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도 태양계의 하나의 행성이나 본래는 태양에서 분리된 천체이니,
한편으로는 공기와 수소의 높은 열로 각종 기체를 만들고 또 다른 요소를 합하여 환상기체(環狀氣體)를 조직하여 자체의 주위를 싸서 반사작용에 의하여 점점 냉각(冷却)됩니다. 이것이 장구한 시일을 경과하여 제일 뜨거운 부분을 분리하여 끝내는 냉각되어 고체(固體)를 이루기 때문에, 환기(環氣)중에 포함된 무거운 요소는 가라앉아 고체와 액체를 이루고, 가벼운 요소는 위로 올라가 기체가 되어 늘 온도의 변화로써 구름과 비도 되고, 혹은 서리와 눈도 되고, 운동으로 전광(電光)이 일어나고 뇌성(雷聲)이 일어납니다.
태양의 빛은 기(氣)의 맑고 탁함과 두껍고 얇음 때문에 변색(變色)하는데, 붉은 색(赤) 노랑색(黃) 등색(橙) 녹색(綠) 파랑색(靑) 남색(藍)자색(紫)이 다 흡수되면 검은색(黑)이 되고, 발산되면 흰색(白)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태양광선이 늘 알맞는 정도와 때를 맞추어 비치므로 형형색색의 동식물(動植物)이 빚어지기 때문에 동식물의 무수한 종자(種子)의 원인을 연구하니, 다 같은 원자(原子)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그 위치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이 만들어지니, 스스로 위와 아래, 영원과 순간, 고통과 즐거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같은 상대성(相對性)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갖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靈長)인 것은 우주생명(宇宙生命)의 돌발점(突發點)이며,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하나의 사상(思想)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지 자연 생물의 원리이며 현상(現狀)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옳은 말이라, 선생은 참 천고의 성인(聖人)이라.”하시고 궤장(几杖)을 내리셨다. (萬里元論에 기록되어 있다.)
48년에 평화롭고 풍년이 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하니, 남문(南門)밖에 태평루(太平樓)를 짓고, 많은 신하를 모아 조서를 내리시기를 “평안할 때에 위태로운 것을 잊지 말고, 즐거울 때에 괴로움을 잊지 말라.
사람이 먼 앞날을 염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근심이 있게 되고, 오늘의 예비가 없으면 훗날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한 그릇의 축과 밥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쉽지 않음을 마땅히 생각하고, 실 한 오라기나 쌀 한 톨을 가지고도 쓸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아끼라.
근검과 절약은 국가가 부해지는 으뜸가는 근본이니, 나와 신하와 백성은 하나가 되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느니라.”하셨다.
50년에 오성(五星)이 누성(屢星)에 모였다.
56년에 황학(黃鶴)이 소나무밭에 와서 깃들었다. 9월에 유위자(有爲子)가 죽으니, 임금께서 통곡하시고 국례(國禮)로 장사를 지냈다.
6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니, 사흘동안 굶고 울었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4세 단제시다.
제 14 세 고불(古弗)
―6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벌음(伐音)을 태자로 삼고, 팽운(彭雲)을 수상으로 삼았으며, 오성(吳成)을 상장으로 삼았다.
6년에 크게 가물어 임금께서 지성으로 비 오기를 기도하시더니, 큰 비가 수천리에 왔다.
10년에 만고후(晩考候)가 반란을 일으키니, 오성(吳成)을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24년에 현육(玄育)이 쳐들어와 노략질 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25년에 은(殷)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36년에 발해 해변에 황룡(黃龍)이 나타나고, 인어(人魚)한쌍이 상륙하였다.
42년에 자모전(子母錢)을 부어 만들었다. (월에 마른나무에 새싹이 나오며, 다섯가지 색깔의 큰 닭이 동성(東城) 마을에서 생겨나니 봉황(鳳凰)이라 하였다.
52년 국립대학(國立大學)을 설립하고, 사방에 있는 학생들을 공부하게 하였다.
56년에 전국에 있는 백성의 수를 조사하니, 총 인구가 1억 8천만이었다.
58년 전토(田土)와 산야(山野)를 측량하여 조세율(租稅率)을 개정하였다.
6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5세 단제시다.
제 15 세 벌음(伐音)
―51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위나(尉那)를 태자로 삼고,
단간선(段干仙)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2년 여름에 큰 홍수가 일어나 백성의 피해가 많았다.
임금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그 백성을 창해빈(滄海濱)으로 이사를 시켰다.
10년에 임금께서 북쪽으로 행차하시어 약수(弱水=黑龍江)에 이르러, 우속(禹粟)에게 금광(金鑛)을 채굴하게 하였다.
28년에 임금께서 심양태수(瀋陽太守)를 불러 이르시기를 “경(卿)이 심양을 지키면서부터 오늘까지 헐뜯는 말이 끊이지 않으나 내가 사람을 시켜 심양을 살피니, 밭과 들이 크게 개발되었으며, 백성은 잘 살고 소와 말이 많이 번식되었으니. 이것은 경이 내 좌우(左右) 신하에게 아첨하지 않은 까닭이라.”하시고 벼슬을 높이고 상을 주셨다.
청해태수(靑海太守)를 불러 이르시기를 “경이 청해를 지키면서 오늘까지 칭찬의 소리가 끊이지 않으나 내가 사람을 보내어 청해를 살펴보니, 밭과 들이 황폐해지고 백성은 가난하여 가축이 번식하지 않으니, 이것은 경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자랑했기 때문이라.
겉모양만 내는 사람은 세상이 다 미워하는데 하물며 군주(君主)된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내가 이미 경의 재능을 알았으니, 경이 일부러 한 일이 아니니, 다시 청해에 가서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라.”하시고 청해로 보내셨다.
창해태수(滄海太守)를 불러 “경이 창해를 지키면서 오늘까지 칭찬도 없고 헐뜯는 말도 없으니, 관원된 도리는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있으니, 책임을 잊고 벼슬자리를 빼앗아 녹(祿)을 탐하는 자는 신하가 할 일이 아니다. 경은 명심하라.”하시고 창해로 보내니, 이때부터 모든 관직에 거짓 자리를 차지하고 먹고 사는 자가 없었다.
36년에 숙부(叔父) 고선(古仙)이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40년에 아우 벌심(伐心)을 달단왕(達但王)으로 삼았다.
5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6세 단제시다.
제 16 세 위나(尉那)
―5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여을(余乙)을 태자로 삼고, 유위자(有爲子)의 아들 유덕자(有德子)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이해 여름에 임금께서는 국정(國政)을 쇄신하고 군기(軍紀)를 바로잡으며, 외척(外戚)이 휘두르는 권한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하여 민폐(民弊)를 없애며, 사치를 금지하고 농사와 누에 기르기를 장려하니, 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기상은 매우 새로웠다.
3년에 궁성(宮城)의 남쪽 문이 너무 오래되어 무너졌는데, 다시 중건(重建)하기를 좌우 신하들이 아뢰니, 임금께서 “국가는 만민의 가옥(家屋)이라.”하시고 막았다.
4년에 임금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상(商=殷)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국정을 관찰하였다.
16년에 전략가(戰略家) 신우천(新尤天)이 아뢰기를 “국방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어서, 땅(地)이 사생(死生)을 좌우하고, 변(變)이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것과 같이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라가 크다고 해서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백성이 아무리 많다 해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니, 마땅히 장병을 교련시켜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비하는 것이 만전을 기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하고 신병서(新兵書) 한 질을 바치니, 임금께서 받으시고 신우천(新尤天)을 상장으로 삼았다.
28년에 만국(萬國)의 제후(諸侯)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회의를 하였다.
황극을(黃克乙)이 아뢰기를 “사람이 스스로 업신여기면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나라가 스스로 교만해지면 반드시 사람들이 교만해지며, 고목(古木)에 벌레가 생기며 썩은 물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과 같이 법(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도(道)가 오래되면 마귀가 유혹하기 때문에, 나라의 기상을 새롭게 고치며 정치와 법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결승(結繩)[주:結繩-새끼줄 매듭으로 된 문자]으로 하는 정치로는 문명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쓸모없는 도덕으로는 복잡한 세상르 교화시킬 수 없으니, 마치 육지에서 배를 움직이는 자는 힘만 들고 얻는 것이 없으며, 겨울에 갈포옷을 입는 자는 몸이 얼어 기(氣)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과 지금은 물과 육지, 겨울과 여름의 차이와 같으나, 왜 옛 정치와 법을 혁신하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가 건국된지 천년이 가깝도록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것은, 다 선열(先烈)과 성제(聖帝)의 유덕(遺德)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백성들은 안락을 오래 누리고 있어 환란을 모르고 있으며, 문약(文弱)에 빠져 용맹에 힘쓰지 않으니 문명이 점점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경박(輕薄)한 자들이 은(殷) 나라 문풍(文風)에 취하여 끝내는 음모자들이 권력을 희롱하여 나라를 잃는 비참한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염려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 아뢰는 말을 신중히 받아들여 법전(法典)을 새로 고치시며, 황극을(黃克乙)을 수상으로 삼았다.
45년에 풍년이 들었다. 임금께서 세우신 모든 기왕(杞王=제후)들이 다 임금께 왓다. 제후들을 보시고 묻기를 “너희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민생(民生)형편은 어떠한가.”하시니, 제후들이 한결같이 대답하기를 “집집마다 잘 살고 있어 별다른 우려가 없고, 다만 하늘이 기울까 하여 우려할 따름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웃으셨다. 후에 사람들이 우려할 것 없는 일울 가리켜 기우(杞憂)라 하였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 17세 단제시다.
제 17 세 여을(余乙)
―6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동엄(冬嚴)을 태자로 삼았다.
3년에 엄년(嚴年)이 쳐들어와, 군사를 보내어 쳐서 멸하였다.
6년에 큰 흉년이 들어 쌓아두었던 곡식(太倉粟)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7년에 임금께서 송술(宋術)에게 천하에서 제일 높은 선비는 누구냐고 물으시니, “세상에서 높은 선비가 없고 오직 고수노(高叟老) 될까 하나이다.”하였다.
임금께서 “내가 장차 불러 문의하리라.”하셨다.
10년 봄에 임금께서 고수노를 불러 정사(政事)를 물으니, 고수노는 대답하기를 “정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입니다. 비록 한 정부 밑에 있다 해도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서로 달라, 백성의 문명과 미개한 정도가 같지 않으니 일률적으로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젖먹이는 젖이 아니면 키울 수 없고 어른은 밥이 아니면 배부르지 않으며, 노인은 고기가 아니면 영양이 부족하고, 병자는 약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정도에 합당한 정치를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술법(術法)입니다.
대체로 정치는 백성을 교도(敎導)하는 일이며 법률은 백성을 징벌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먼저 가르치지 않고 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 하는 것과 같아서, 어진이가 왕위에 있으면서 어찌 백성을 법만으로 다스리겠습니까.
교도하는 방법은 대략 몇 가지 있습니다. 낮은 백성은 먹고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항상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게 한 후에 예의를 가르치며 법도로써 이끌어야 하고, 서로 도와 순종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데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입니다. 만일 백성이 늘 할 수 있는 생업(生業)이 없으면 항심(恒心)[주:恒心-늘 지닐 수 잇는 떳떳한 마음]이 없어지고, 항심이 없으면 사기(詐欺)와 도적을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추워도 입을 옷이 없으면 아무리 자비로운 아버지일지라도 자식을 기를 수 없는데, 군주(君主)가 어떻게 그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옛 글에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옷과 먹을 것이 풍족해야
영광과 욕됨을 안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은 생산을 늘려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을 정치의 요소로 삼고, 혹 세금을 낮추며 대부(貸賦)하여 주며, 물가와 물자를 알맞게 조정하며 가축을 빌려주는 등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국고(國庫)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으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기를, 마치 벌통에 꿀을 넣어주는 것과 같이하여 감동되게 하면 힘든 것도 잊고 생업에 매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상을 주지 않고도 백성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 상류층 백성들에게는 민권옹호정치(民權擁護政治)를 해야 합니다. 옷과 밥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민권옹호로써 그 인격을 존중하여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어, 배운 학문과 평생의 포부를 펼치게 하면, 공적인 일에 용감히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또 장병(將兵)을 양성하는 데는 특권을 허락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위풍을 우러러보게 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기르고, 국립장관학교(國立將官學校)를 세워 백성들에게 수업하게 하면 이것은 국방을 위한 정치입니다.
또 높은 관직에 있는 자는, 그 지도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알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으면, 이것은 나를 버리고 공(公)을 받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관군민(君官軍民)이 일치되어 행정이 이루어지면 곧 사위일체(四位一體)의 정치이니, 항상 대세와 환경에 따라 비록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국시(國是)를 잊지 않으면 빈틈없이 완전한 정치가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고, 국태사(國太師)로 삼았다.)
18년에 고수노(高叟老:순임금 아버지)가 정법원론(政法原論) 38편을 바치니 18만언(言)인데,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국민들로로 하여금 학습하게 하였다.
20년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38년에 은(殷) 나라 사절이 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42년에 나라가 태평하고 무사하니 이 때에 동등한 나라는 은 나라 뿐이며, 그 외는 모두 따르며 복종하는 나라(臣服國)이며, 그 나머지는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하루는 임금께서 조용히 고수노(高叟老)에게 묻기를 “인생 백년이 마치 갈매기의 틈을 잠깐 지나가는 것과 같고, 백발은 누구나 다 가는 길이니, 귀하고 천한 차이가 없는 것인데 사람이 홀연이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하니,
고수노가 대답하기를 “사람은 천지간의 하나의 물(物)입니다.
물(物)은 양(量)이 무궁하여 시(時)가 그침이 없으며, 분(分)이 같지 않으며, 시작과 마침은 고정(固定)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슬기는 멀고 가까운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작아도 적다고 하지 않으며 커도 많다고 하지 않는 것은, 양(量)이 무궁하기 때문이며, 옛과 지금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아득히 멀어도 근심하지 않으며, 어두워도 빛이 차지 않음은 시(時)의 그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고(盈) 빈(虛) 것을 살폈기 때문에 얻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잃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은 분수(分數)의 무상(無常)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항도(恒道)에 통달했기에 나도(生) 기뻐하지 않으며 죽어도 화(禍) 하지 않는 것은, 나중과 처음이 고정되지 못함을 아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아는 것을 계산하면 그의 모르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살고 있는 때가 태어나기 전보다 낫지 않으나, 이미 태어났으니 난 자는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할 제물(祭物)이며, 사람의 몸은 그 책임을 위하여 사용할 기구입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그 몸을 써서 목적을 달성하면, 몸은 비록 죽으나 대아(大我)의 정신에는 해(害)가 없을 것입니다.
관민장병(官民將兵)은 그 한 사업을 위하여 분담한 편리한 방법입니다.
절대적인 책임으로 보면 관민장병은 서로 같은 한 몸이니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관(官)은 높고 백성은 낮으며 장(將)은 귀하고 졸(卒)은 천하다는 것은, 나라가 가난해지고 군사가 약해질 수 있는 악한 원인입니다.
옛말에 백성의 현철(賢哲)은 군주의 용렬하고 어두움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평범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는, 군주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도 절대로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다한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천궁(天宮)에 가면, 사업(事業)과 영혼이 공존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인생이 잠깐 백발이 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백발은 사업의 표증(表證)이니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공연히 백발만 탄식하는 것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위대한 공적과 대업(大業)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내려다 보아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 말은 나에게 약이 된다.“하시고 더욱 정사에 힘쓰셨다.
52년 봄에 임금께서 백산(白山)에 가보실 때에, 백산 봉인(封人)[주:封人-봉역(封域)을 지키는 벼슬아치]이 아뢰기를 “성인(聖人)에게 비오니, 성인으로 하여금 오래사시고 부(富)하시고 아들을 많이 두소서.”하니 임금께서 “사양하노라. 오래 살면 이웃에 욕이 되고, 부하면 많은 사람의 원한을 사게 되고, 남자가 많으면 사람의 허물을 받게 된다. 천하에 도(道)가 살아 있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도를 닦고 덕을 기르다가, 늙어 세상을 뜨면 천궁(天宮)에 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하셨다.
6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8세 단제시다.
제 18 세 동엄(冬嚴)
―49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종년(縱年)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은(殷) 나라 사절이 오니, 사자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5년에 고수노(高叟老)에게 국사(國史) 18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10년에 약목(若木)을 수상으로 삼고, 금내물(金乃勿)을 상장으로 삼았다.
20년에 임금께서 서변(西邊)을 돌아보실 때에, 사람을 서장(西藏)에 보내시어 함문경(咸文經)을 구하여 왔다.
49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9세 단제시다.
제 19 세 종년(縱年)
―5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고홀(固忽)을 태자로 삼고,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菁莪王)으로 삼으니, 청아왕의 증손(曾孫)은 서여(西餘)인데, 이 분이 조선기자(朝鮮奇子)의 태조(太祖)가 되었다.
3년에 국문서당(國文書堂)을 세워 백성들에게 학습하게 하였다.
10년에 패엽전(貝葉錢)[주:貝葉錢-조개로 만든 옛날 돈]을 만들었다.
16년에 공창(工廠)을 세우고, 닥나무껍질로 종이를 만들고 칙껍질로 베를 짜 옷감을 만들었다.
24년에 남상인(南裳人=越裳)이 조정에 들어왔다.
26년에 조선공창(造船工廠)을 송화강(松花江) 남쪽 기슭(南岸)에 세웠다.
45년에 황운갑(黃雲甲)이 지남차(指南車)와 목행마(木行馬)를 발명하니,
임금께서 후하게 상을 내리셨다.
51년에 목아득(牧雅得)이 우주원리론(宇宙原理論)을 저술하였다.
54년에 지이숙(支離叔)이 태양력(太陽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하였다.
5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0세 단제시다.
제 20 세 고홀(固忽)
―43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소태(蘇台)를 태자로 삼았다.
은 나라 사절이 들어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4년에 북흉노(北凶奴)가 변방에서 어른노릇을 하니,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11년 가을에 흰무지개(白虹)가 태양을 꿰뚫었다.
28년에 임금께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시어, 은(殷) 나라 서울에 이르러 다음 달에야 돌아오셨다.
36년에 이궁(離宮=別宮)을 영고탑(寧古塔)에 두었다.
40년에 공을홀(工乙忽)이 천하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43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1세 단제시다.
제 21 세 소태(蘇台)
―52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색불루(索弗婁)를 태자로 삼고, 상유덕(尙有德)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3년에 공신(功臣) 여심심(黎尋心)을 창해군(滄海君)으로 삼았다.
13년에 동해빈(東海濱)에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키가 아홉자나 되고 천 사람의 힘을 가졌다 하여, 임금께서 사람을 시켜 불러다가 수변장(守邊將)을 삼으니, 절인적(絶人跡)이라 불렀다.
44년에 은 나라 사절이 왔다.
51년에 아우 홀라(忽那)를 회을왕(回乙王)으로 삼았다.
52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2세 단제시다.
제 22 세 색불루(索弗婁)
―4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아홀(阿忽)을 태자로 삼았다.
6년에 육우(陸右)가 아뢰기를 “길림(吉林)은 천년 동안 도읍할 땅인데 대운(大運)은 이미 다 가고 영고탑(寧古塔)[주:寧古塔-지금 만주 목단강(牧丹江) 아래의 영안(寧安)]은 왕기(王氣)가 서려 있으니,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 보다 못합니다.”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람을 시켜 영고탑에 성을 쌓았다.
10년 10월에 황무(黃霧)가 끼었다.
36년에 반역하는 신하인 신독(神督)이 군사를 일으켜 궁성에 쳐들어옴으로, 임금께서 영고탑에 피난하셨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영고탑에 이주하여 살게 되어 동북방의 큰 도시가 되었다.
4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3세 단제시다.
제 23 세 아홀(阿忽)
―7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연나(延那)를 태자로 삼고, 오한(吳漢)으로 태자태부를 삼았다.
4년에 은 나라 사절이 왔다.
5년에 중신회의를 열고 영고탑(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토의하였다.
12년에 돌궐(突厥)[주:突厥-터키계 사람들이 세운 나라] 사절이 왔는데 후하게 대접하였다.
19년에 신독(神督)의 아들이 쳐들어왔으나, 아덕(亞德)이 그의 목을 베었다.
25년에 송화강(松花江)연안의 각 공장을 수리하였다.
32년에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병학(兵學)을 가르쳤다.
53년에 임금께서 영고탑을 친히 시찰하시고, 정전법(井田法)[주:井田法-고대사회에 잇었던 전제도(田制度)]을 가르치셨다.
61년에 영고탑을 다시 수리하였다.
70년에 크게 가물어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75년에 훌륭한 재상인 아덕(亞德)이 왕을 보좌하니, 나라가 태평해졌다.
7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4세 단제시다.
제 24 세 연나(延那)
―11년간 재위―
첫 해에 아우 솔나(率那)를 태자로 삼고, 오한(吳漢)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삼았다.
4년에 은 나라 사절이 왔다.
8년에 월남만(越南蠻)이 와서 조정을 방문하였다.
10년에 조대원(趙大元)이 정치원론(政治原論) 10권을 바쳤다.
1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5세 단제시다.
제 25 세 솔나(率那)
―50년간 재위―
후단조(後檀朝) 제 1세단제(第一世檀帝) 솔나(率那)는 전단조 제23세 단제 아홀(阿忽)의 둘째 아들이며, 24세 연나(延那)의 아우이다. 단군 기원 1214년 7월 15일 영고탑(寧古塔)에 도읍을 옮겼다.
임금께서 무(武)에 용맹하시고 명철(明哲)하시며, 강직하시고 공평하시며 정치적 분부가 일관성이 있으며, 법도(法度)가 평탄하시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을 어루만지셨다.
5년 봄에 조서를 내래시어 “임금이 백성이 없으면 누구를 다스리며 백성은 군주가 없으면 누구를 받들겠는가. 백성이 국가의 기본이며 임금은 국가의 중심이니, 기본이 없으면 중심이 소용 없고 중심이 없으면 기본이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오직 군신(君臣) 상하(上下)는 동심일체가 되어야 완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나와 백성은 마땅히 함께 힘써 희망찬 내일을 맞이하게 하라.”하셨다.
6년에 국민의 세금을 반으로 감하였다.
7년에 농사가 풍년이 들어 나라 창고에 재물이 여유가 있었으며 큰 창고에는 곡식이 남았다. 노인은 영가(詠歌)를 부르고 아이들은 춤을 추니 봄바람에 꽃 향기가 그윽함과 같았다.
8년에 임금께서 홍운성(洪雲性)에게 묻기를 “바른 신하와 바르지 못한 신하를 어떻게 구별하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이(理)를 잡고 굴하지 않는 자가 바른 신하이며 위엄 앞에 맹종하는 자는 거짓 신하입니다. 임금은 근원이며 신하는 그 흐름이니, 근원을 흐리게 하고 그 흐름이 맑기를 원하는 자는 얻지 못할 것이니, 임금께서 어진 후에야 신하가 바르게 되나이다.”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셨다.
9년에 임금께서 홍운성(洪雲性)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나라가 오래가겠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비록 천하를 얻었다 해도 더욱 인의(人義)를 바로잡아 나간 후에야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일 거짓을 숭상하고 허위(虛僞)를 행하면 국운이 짧아지고야 말 것입니다. 천하를 손에 넣을 때 혹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얻을 수도 있으나, 이것을 지켜나가는 데는 순리(順理)를 따라야 하는 법인데, 세습으로 이어 나라를 다스릴 임금께서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15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왔다.
19년에 황학(黃鶴)이 소나무 밭에 깃들었다.
20년에 밭 곡식이 풍년이 들어 줄기 하나에 이삭이 다섯 개나 되는 것도 있었다.
22년에 조윤국(趙允國)을 수상으로 삼고, 감라덕(甘羅德)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28년에 임금께서 조윤국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양신(良臣)이 되며 어떻게 하면 충신(忠臣)이 되느냐.”하시니,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협의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 모두 복락(福樂)을 누리게 하면 양신(良臣)이며, 임금의 얼굴을 돌보지 않고 조정에서 바른 소리를 하며 나라의 위기만 생각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충신입니다.
사람이 자기 용모를 보고자 하면 반드시 양신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현군(賢君)이 있어야 양신이 있고 명군(明君)이 있어야 충신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고 옳다.”하셨다.
5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세 단제시다.
제 26 세 추로(鄒魯)
―6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두밀(豆密)을 태자로 삼고,
자운(紫雲)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2년에 강주문(姜周文)이 아뢰기를 “옛날에 팽오(彭吳)가 산을 파고 물을 다스리는데 백성의 원한이 없어진 것은, 사람들에게 함께 공평한 공동이익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하께서는 궁궐을 지으니 백성의 원성이 많은 것은, 사사로운 일에 치우쳐 사람을 해하고 자신만을 이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임금된 분이 사람을 해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아름다운 구슬을 얻어 몸을 가르고 그 속에 구슬을 간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진 임금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으며, 어두운 임금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롭게 듣는 것이 많아지고 듣는 것을 겸하면 듣지 못하는 소문이 없게 되고, 자기를 이롭게 하면 한쪽 말만 듣게 되고 한쪽 말만 들으면 담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과 같아서, 가까운 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먼곳의 소리는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철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며 가까이에서 하는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며,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으므로 모든 간신(奸臣)이 자신을 숨기지 못합니다.
어두운 임금은 한편만 믿고 모든 신하들에게 널리 묻지 않기 때문에, 그 소견이 대통 속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서 비록 현명한 신하와 어진 보좌관이 옆에 있어도 버리고 쓰지 않으니, 도리어 사람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의논하겠습니까.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어질고 명석한 선비의 기를 북돋아 주시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잘못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여 정사를 돌보신다면, 천하는 태평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은 말이라고 여기셨다.
4년에 임금께서 이사금(尼師今)에게 묻기를 “음악에 흥망(興亡)의 곡조가 있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옛날 성군(聖君)과 명왕(明王)이 세상 것으로 사람을 교화(敎化)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므로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들으면 기쁘고, 걱정과 슬픔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서러워집니다.
그러니 슬픔과 즐거움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음악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차 나라가 흉하려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뻐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 할 것이며,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들의 마음이 우울하여 음악을 들어도 슬퍼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시대의 현상을 보아 흥하고 망할 곡조임을 이룰 따름이니, 사실은 그것이 음악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태평시대에는 비록 슬픈 곡을 연주한다 해도, 기쁘고 즐거운 흥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고 하셨다.
8년에 신하들이 임금께 나아가니,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피지 않으면 큰 화가 될 것이니 모든 일에 주의하라.”하셨다. 이 분부를 듣고 신하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15년에 오성원(吳聖源)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평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쳐도 감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을 겪은 백성은 고생을 함께 걱정해 주면 감화되기 쉬우니, 비유하면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이 달고 배부른 자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백성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우니, 전하께서는 민정을 잘 살피시어 교만하고 방자한 관습을 없애기 바랍니다.“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따르셨다.
20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28년에 달단(韃靼)의 추장(酋長)이 입조하였다.
39년에 의학원(醫學院)을 세워 국민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40년에 고주만(高朱滿)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인재를 잘 살펴서 쓰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군자(君子) 하나를 쓰면 군자가 다 모이고, 소인(小人)하나를 쓰면 소인들이 다투어 오게 됩니다.
천하가 어지러워 편하지 못하면 재주만 취하고 그 행실은 관계하지 않으나, 천하가 평정되면 재주와 덕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써서는 안됩니다.
신이 요즘 모든 관리들의 움직임을 보니 전하 앞에서는 아뢰고자하는 것의 삼분의 일도 아뢰지 못하니, 하물며 간(諫)하는 관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망을 받을까 하여 바른 말을 아뢰지 못하오니 전하의 특별한 허락이 없으면 어떻게 정(情)을 다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는 온화한 표정으로 백성을 사랑하시고, 선비들에게는 몸을 낮추시면 간하는 관리(諫官)가 뜻을 다하여 천하의 사정을 낱낱이 아뢸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그 뜻을 따르셨다.
58년에 위문국(魏文國)이 정치론(政治論) 28권을 지어 바쳤다.
6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세 단제시다.
제 27 세 두밀(豆密)
―26년간 재위―
첫 해에 해모(奚牟)를 태자로 삼고, 황극명(黃克明)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한진거(韓眞渠)를 수상으로 삼고, 김일황(金日黃)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3년에 정지선(鄭知先)이 아뢰기를 “임금께 아뢰는 상서(上書)가 격렬하고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아뢰는 말도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으니, 임금이 그런 실정을 살피지 못하고 가끔 그 신하에게 죄를 묻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길은 막히고 충성된 마음으로 아뢰는 말은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속담에 젖먹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듣는다고 했으니, 전하께서는 간절하고 절실한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께서 정말 옳은 말이라고 하셨다.
8년에 심한 가뭄 위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거두어들일 곡식이 없어,
조서를 내리시어 창고에 쌓아 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2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세 단제시다.
제 28 세 해모(奚牟)
―2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휴(摩休)를 태자로 삼고, 황노명(黃老明)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3년에 황노명이 아뢰기를 “임금된 자는 시작은 선하게 하는 자가 많으나 끝을 선하게 하는 자가 적으니, 취(取)하기는 쉬우나 지켜나가기가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근심되면 정성을 다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안일해지면 방자하여 사물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원수와도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사물을 소홀히 여기면 친척이라도 헤어지게 되니, 만일 위엄만으로 다스린다면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하나 내심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행실은 가령, 욕심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침이 보여지면 그쳐야 할 것을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 아랫 사람에게 겸손할 것을 생각하며, 가득차면 덜 것을 생각하고, 방탕(放蕩)을 만나면 절제를 생각하고, 안락(安樂)하면 음행을 멀리 할 생각을 하며, 그릇된 것과 거짓을 보면 스스로 바르게 할 것을 생각하며, 상 줄 때에는 기뻐서 지나치게 잘난체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을 생각하며, 형벌을 줄 때에는 노하여 과격해질까를 생각하시옵소서.
이런 여러 생각을 고려하여 어진 사람을 뽑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8년에 탁암(卓岩)이 돌로 북(鼓)을 만들어 바쳤다.
9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사절이 입조하였다.
10년에 황노명(黃老明)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한 것을 좋아하시는 마음(心志)이 옛날에 미치지 못하고, 도(道)를 듣고 허물을 고치는 일은 지난날보다 못하고, 벌을 주실 때는 노하시므로 휴식할 틈이 없습니다.
옛 말에 귀하다고 높은 것을 기대하지 말며, 부해도 많은 것은 것을 바라지 말라 한 것이 헛된 얘기가 아닙니다.
옛날에 하(夏) 나라가 난이 있기 전에는 스스로 난이 없다고 장담하였으며, 난이 일어나니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부역(賦役)이 많고 교만과 사치가 지나쳐 재난이 몸에 이르렀는 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용모(容貌)를 비추어 보려면 맑은 물이 필요하고, 실패를 알고자 하면 망한 나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하(夏)나라를 거울 삼아 사치를 몰아내고 검소한 생활을 하게 하며, 충현(忠賢)과 친하고 간사한 자들을 멀리하여 현재 무사함으로서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여 둔다면, 이것은 국가의 철석같은 간성(干城)이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1년 여름에 태풍이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니,
육지에 고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13년에 황노명(黃老明)이 또 아뢰기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말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말하기 전에 있기 때문이며,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은 그 행하는 것이 명령하지 않아도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 백성을 다스리신지 13년동안에 덕으로써 감화시키는 일이 부족한 것은, 오직 좌우 신하가 정성을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금 입법 행정을 군자와 같은 사람에게 맡겨도 잘되는 때도 있고 잘 안되는 때도 있는데, 가끔 소인(小人)에게 위임하시니……그러므로 군자를 대접할 때에는 공경하며 멀리하고 소인을 대우할 때에는 가볍게 친하게 되니, 친하면 못하는 말이 없고 멀리하면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왜 작은 지혜조차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면 앞으로의 일을 깊이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 비록 있는 정성을 다하여 애쓸지라도 실패 하는 때도 있는데, 하물며 간사한 마음을 품고 정사(政事)에 참여한다면 그 화가 어찌 가볍겠습니까.
간혹 군자라도 조그마한 과실이 없을 수 없는 일인데, 그 과실이 정도(正道)를 해치지 않도록 행정을 펴 나가기만 한다면, 이것은 (道)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군자라도 불신하여 의심한다면, 이것은 곧은 나무를 세우고 그 모양이 곧지 않음을 의심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나라에 위태로운 때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스스로 평안하다 하는 것은 마치 제비가 지붕 위에 있으면서 기둥에 불이 붙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미와 새끼가 서로 즐기는 것과 같으니, 임금된 분은 반드시 장래 일을 깊이 헤아리시옵소소.“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황노명을 국태사(國太師)로 삼으셨다.
18년에 가락(駕洛=弁韓人)이 입조했다.
2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5세 단제시다.
제 29 세 마휴(摩休)
―34년간 재위―
첫 해에 아우 나휴(奈休)를 태제(太弟)로 삼고,
이장선(李長善)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2년에 주태원(周太元)이 아뢰기를 “옛날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나라는 은혜를 사람들 마음 속에 심었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았으며, 그렇지 못한 나라는 은혜를 사람들 마음 속에 심지 못하였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당장은 아무 이익이 없으나 장래에는 크게 보상이 있는 보화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근본이 단단하면 가지도 번영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선대(先代)임금의 다스림을 이어 자손만대의 터를 견고하게 하옵소서, 그러니 어찌 눈앞의 일만 보겠습니까.
현재의 호구(戶口)가 옛날의 10분의 6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부역에 급급하여 형이 나가면 아우가 돌아오고, 서로는 길에서나 겨우 만나는 형편입니다. 전하께서는 조서를 내리시어 손해를 덜고자 한, 토목사업을 그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휴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옛 글을 봤더니, 옛부터 지금까지 백성의 원한이 모여 도적이 되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제왕된 자가 현재의 어질지 못함으로 전의 어질지 못함을 비웃고, 오늘의 덕 없음으로써 전의 덕 없음을 비웃으니, 인덕(仁德)은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은 듯합니다.
옛날에 9년 홍수가 있었어도 오히려 쌓아둔 것들이 많았고 백성들의 원성이 별로 없더니, 오늘날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도 창고에 곡식이 없고 백성들의 원성이 있는 것은, 전하께서 급하지 않은 공사를 많이 벌려놓은 때문입니다. 나라의 흥망이 흉년과 풍년에 있지 않고 오직 백성들의 괴롭고 즐거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돌보는 것이 먼저할 일이며, 백성들이 부해지고 여력이 있을 때가지 기다려 거두어 들일 것이며, 강제로 징수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나라가 장구하게 이어나갈 수 있는 계획을 세우시려면, 먼저 은혜로써 인심을 묶어 길이 그것을 풀지 못하도록 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셨다.
8년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다.
9년 가을에 남해(南海)의 조수가 석자(三尺)나 물러났다.
15년에 고문술(高文述)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이 함께 천하를 얻으려면 수많은 생명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창업의 어려움을 알아야 하고,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군신은 나라의 교만과 사치가 부귀에서 생겨나고, 재앙과 난리는 소홀히 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을 현실에서 봤기 때문에 왕조를 지켜나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신된 자가 창업의 어려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신된 자가 창업의 어려움을 알고, 때와 정세를 따라 국가를 안전하게 보전한다면 훌륭한 임금, 좋은 신하가 될 수 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29년에 훌륭한 재상인 신운선(申雲善)이 임금을 잘 보좌하여 나라가 태평하였다.
3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6세 단제시다.
제 30 세 나휴(奈休)
―3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등을(登乙)을 태자로 삼았다.
2년 기자조선(奇子朝鮮)사람 40명이 입경(入京)하여 관광하였다.
5년, 북흉노(北凶奴)가 사신을 보내어 우호하기를 원하여 허락하였다.
10년 동돌궐(東突厥)이 사신을 보내어 수호조약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20년에 박달마(朴達摩)가 아뢰기를 “백성의 문화향상과 발전은 오직 정치와 학문이 일치되어야 가능합니다. 대개 정치는 개념이며 학문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정치의 위신은 백성으로 하여금 법을 준수하게 하려면 준수하게 하고, 친밀하게 하려면 친밀하게 해야 하나, 정치는 승진(昇進)할 경로가 있고 학문은 향상 할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정에 맞도록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서로 형상화(形象化)하면, 이것이 정치와 학문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곧 백성의 윤리가 그 실행하는 정치의 사정에 따라 실생활에 통하는 것이 마치 육체의 혈액순환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개념적 정치 이념이 구체적으로 생활에 용해되면, 생활이 곧 이념이 되고 이념은 곧 생활이 됩니다.
요컨대 이념이 개인의 실사정(實事情)에 용해되어 문화로써 생활을 삼고 문화로써 행동을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구체적(具體的)인 작품화(作品化)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학문은 정치의 선구자가 되고 정치는 학문을 기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정치와 학문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데, 지금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정치의 권위에 황홀하여 정치에 흡수되어 학문의 사명을 잊고, 주체(主體)를 잃은 학문과 합하고자 하고있습니다.
이에 은(殷) 나라 학문이 이 기회를 타고 들어와 오히려 백성의 생활에 해가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서는 쓸데없는 학문을 멀리 하시고, 필요한 학문은 바로 세우시어 백성의 실생활을 도우소서.“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시고 쓸데없는 학문을 멀리 배척하셨다.
28년에 주태보(周太甫)가 신주역서(新周易書) 13권을 임금께 바쳤다.
그 편집내용은 태양 태음설(太陽太陰說)과 현공설(懸空說)과 복서(卜書)와 천문설(天文說)과 지수설(地水說)이다. 임금께서 훑어보시고 불쾌하여 이르시기를 “후세에 이 글로써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으리라.‘하셨다.
30년에 부분석(扶芬錫)이 정법원리론(政法原理論)을 임금께 바쳤다.
3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7세 단제시다.
제 31 세 등을(登乙)
―2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추밀(鄒密)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조자문(曹子文)이 아뢰기를 “정치와 법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행정관(行政官)과 사법관(司法官)은 각각 그 직책이 달라야 서로 권한을 빼앗지 않고, 그렇게 해야 정치와 법률이 명백하여 공정하게 시행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시며, 입법(立法)과 사법(司法)과 행정(行政) 기관을 각각 세워 다스리니, 정치와 법률이 공평하였다.
5년에 오개(吳介)를 상장(上將)으로 삼으니, 오개가 용병(用兵)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선(兵仙)이라 불렀다.
16년에 기린(麒麟)이 상림원(上林苑)에 와서 놀고 있었는데,
그 성품이 선량하여 생초(生草)를 밟지 않았다.
20년에 고삼도(高三道) 복승자(卜承子) 양화상(楊花相)등
훌륭한 신하들이 임금을 보좌하였다.
2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8세 단제시다.
제 31 세 추밀(鄒密)
―3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감물(甘勿)을 태자로 삼고, 고삼도(高三道)를 태자태부로 삼았다.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3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하나인 문고추장(們古酋長)이 입조하였다.
4년에 북적(北狄)이 쳐들어오자 곧 물리쳤다.
6년에 주(周) 나라 망명객 호선(胡先)이 입국하였다.
9년에 진(秦) 나라 사람 원회(原檜)가 입경하였다.
12년에 초대부(楚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입경하였다.
13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15년에 농작물이 크게 부족하여 굶주렸다.
26년에 손흥렬(孫興烈)이라는 권세가 대단한 신하가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물리쳤다.
3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9세 단제시다.
제 33 세 감물(甘勿)
―24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오루문(奧婁門)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주(周) 나라 상인 한직(韓直)이 호랑이 가죽과 코끼리 가죽을 많이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3년에 송(宋) 나라 사람 우문술(宇文述)이 와서 주(周) 나라 제후(諸侯)의 전란사(戰亂事)를 말하였다.
4년에 황선문(黃先文)이 유황발사총(硫黃發射銃)을 만들었다.
7년에 시조 단군묘(檀君廟)를 영고탑(寧古塔) 서쪽에 건립하였다.
8년에 순길(舜吉)이 약을 만들었는데, 장생불노단(長生不老丹)이라 불렀다.
9년에 임금께서 고삼도(古三道)에게 묻기를 “나라 재상(宰相)의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라야 하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사는(居)데 화목한가를 보며, 통달 해도 그 처신을 보며, 부(富)해도 남에게 주는 것을 보며, 가난해도 그 취하는 것을 보고, 궁(窮)해도 그 하지 않는 바를 보고, 평안해도 음행하지 않음을 보며, 난(難)이 있어도 그 구(救)하는 바를 보며, 급(急)해도 그 들어가지 않음을 보며, 귀(貴)해도 그 자랑하는 바를 볼 것이니, 이 아홉가지(九條)로써 택하시면 됩니다.”했다.
16년에 임금께서 조용히 고삼도(古三道)에게 묻기를 “현인(賢人)을 잘 택하는 방법에 무엇부터 먼저 하면 좋겠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며, 난(難)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色)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書)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여야 합니다.
이 열한가지(十一徵)가 구비되었으면 현자(賢者)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께서 웃으시며 이르기를 ”그 방법외에는 모르느냐“하셨다.
18년에 조(趙) 나라 사람 염선관(廉先官)이 보옥(寶玉)을 가지고 조정에 왔다.
19년에 위(魏) 나라 사람 범문(范文)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20년에 환관(宦官=내시) 조석(趙錫)이 형벌을 받아죽었다.
2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0세 단제시다.
제 34 세 오루문(奧婁門)
―23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사벌(沙伐)을 태자로 삼고,
서정년(徐正年)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황태명(黃太明)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강자삼(姜子三)은 상장으로 삼았다.
4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 백성이 노래하기를 “하늘에는 해가 떠서 밝은 빛을 비추고, 나라에는 임금이 계셔서 덕이 빛나니, 우리 쌀알 같은 백성들은 그 은혜의 창파에 목욕하느니라.”하였다.
8년에 채(蔡) 사람 을보천(乙普天)이 복술서(卜術書)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9년에 노(魯) 나라 문인(文人) 공명지(孔明之)가 중화서적(中華書籍)을 가지고 입조하였다.
10년에 두 해(兩日)가 함께 떠오르듯 왕무(黃霧)가 사방을 덮었다.
21년에 백건적(白巾賊)의 난이 있어, 임금께서 견적(遣迪)으로 피난가셨다가 이등해 8월에 다시 환궁하셨다.
23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1세 단제시다.
제 35 세 사벌(沙伐)
―6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매륵(買勒)을 태자로 삼았다.
제(齊) 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하은고서(夏殷古書)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3년에 한(韓) 사람 주태후(周太候)가 신농(神農)의 약방(藥方)을 가지고 입조하였다.
4년에 위대부(魏大夫) 백측(伯則)이 입조하였다.
6년에 황충(黃虫)과 홍수가 있었다.
8년 4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11년에 오(吳)나라 태사(太史) 서춘문(徐春文)이 입국하였다.
14년에 큰 호랑이가 궁궐 담장을 넘어왔다.
16년에 좌복야(左僕射) 조태국(趙太國)의 집 뒷뜰 땅 위에 연(連)이 돋았는데, 태국(太國)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육연(陸連)이라 하였다.
28년에 위(衛) 나라 사람 적인문(狄人問)이 신천문학(新天文學)을 가지고 입경하였다.
36년에 송(宋) 나라 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40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5년에 홍수가 있어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변이 생겼다.
48년에 진(晋) 사람 명문병(明文柄)이 와서, 주공(周公)의 전장법도(典章法度)가 빛나게 구비되었다고 하니, 임금께서 좋다고 하셨다.
50년에 초(楚) 나라 문인(文人) 문술(文術)이 입경하였다.
60년에 견융(犬戎)[주:犬戎-중국 은 나라 주 나라시대 섬서성 부근에 살던 족속]이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61년에 임금께서 기자조(奇子朝)에 행차하시어 한달이 지나서 환궁하셨다.
62년에 조육련(趙陸蓮)을 승상(承相)으로 삼았다.
6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2세 단제시다.
제 36 세 매륵(買勒)
―5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물(麻勿)을 태자로 삼았다. 여름에 주(周)나라 사절이 왔다.
3년 봄에 연(燕) 왕이 사절을 보내어 국정을 관찰하고 돌아갔다.
4년에 서세모(徐世謀)가 아뢰기를 “지금 제후(諸侯) 중에는 전하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많고 또 이웃 주(周) 나라가 미약하며, 그 봉한 자제(子弟)가 서로 원수같이 다투고 있습니다. 신이 지난 봄에 국명(國命)을 띠고 주 나라에 들어가 그 대세를 보았는데, 서로 전쟁할 기미가 있으므로, 제가 주태재(周太宰)에게 중앙정부를 충실히 하고 강하게 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더니, 주태재가 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귀국하여 우리의 형편을 깊이 생각하니 주 나라와 나라 사정이 매우 흡사합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밝히 살피시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그 말을 받아들여, 다시 주 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협약을 맺었다.
6년에 초(楚) 사람 오자도(吳子度)가 목면(木棉) 종자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10년에 화(華) 사람 설삼덕(薜三德)이 말하기를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였다.
13년에 채저명(蔡著明)이 정치형법서(政治刑法書)를 전하였다.
20년에 당장경(唐莊京) 학사(學士) 두 사람이 입경하였다.
25년 오경박사(五經博士) 우문충(宇文忠)이 토지를 측향하고,
지도를 만들며 유성설(遊星說)을 저술하여 바쳤다.
26년에 몽고대부(蒙古大夫) 환선(桓善)을 명하여 제후로 삼았다.
28년에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30년에 우세숙(虞世叔)이 성리학(性理學)과 심리학(心理學)을 지어 임금께 바쳤다.
32년에 서쪽 민가에서 소가 발이 여덟게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35년에 동해변에 용마(龍馬)가 나타났는데, 등에 별이 새겨져 있었다.
38년에 한(韓) 사람 장세덕(張世德)이 미녀(美女)와 진주를 바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언약없이 바치는 것은 반드시 그 속에 간사한 계략이 있다.”하시고 물리치셨다.
40년에 북적(北狄)[주:北狄-중국 사람들이 중국 북쪽에 있는 종족을 이렇게 불렀다.]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55년에 손숙문(孫叔文)이 의학(醫學)과 화학(化學)을 저술하여 바쳤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3세 단제시다.
제 37 세 마물(麻勿)
―5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다물(多勿)을 태자로 삼았다. 진(秦)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토목(土木)을 크게 일으켜 궁궐을 중건(重建)하였다.
5년에 방공전(方孔錢)을 부어(鑄) 만들었다.
8년에 모문후(毛文候) 유례(有禮)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10년에 주(周) 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았다.
13년에 진(秦) 사람 석무득(昔無得)이 천리마(千里馬)를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열성제(列聖帝)의 송덕비를 동문(東門)밖에 세웠다.
18년에 이선량(李善良)을 승상으로 삼았다.
19년에 어떤 자가 종묘(宗廟)의 기물(器物)을 도적하여 갔는데,
형(刑)을 감하여 유배를 보내니 이때부터 형정(刑政)이 너그럽고 공평하여
백성이 다 그 덕을 기리었다.
25년에 궁궐 동산(苑)에 큰 뱀이 들어와 죽었다.
궁액기(宮掖記)
[궁궐 뜰안에 큰 거미가 있었는데 큰 뱀이 와서 거미를 잡아먹으려 하자, 거미줄 아래 엎드려 위를 향해 입을 열고 독기를 토하였다. 몇 날 못되어 뱀이 죽고 거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뱀의 배를 가르고 검사해 보니, 배 안에 큰 석웅황(石雄黃) 한뭉치가 있는 것을 보고 거미가 복수하고자, 뱀을 죽이는 유일한 독약인 석웅황을 구하여 묘한 계책으로 먹여 죽인 것을 알게 되었다.]
38년에 성(城) 북쪽 땅이 내려앉아 큰 연못이 된, 큰 샘이 솟아나 배를 띄울 수 있는 정도였다.
48년에 도인(道人) 황학노(黃鶴老)가 신술(神術)이 있어,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 가니 용사(龍師)라 하였다.
50년에 장백산(長白山)에 양선자(養仙子)라는 숨어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160살에 이르렀어도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았다.
5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4세 단제시다.
제 38 세 다물(多勿)
―4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두홀(豆忽)을 태자로 삼았다.
3년에 기자조선 사절이 입조하였다.
8년에 위(魏) 나라 박사 진덕기(陳德基)가 입경하였다.
10년에 정(鄭) 나라 사람 신도회(申屠懷)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15년에 흰 학(鶴)이 궁궐 안의 소나무에 와서 살더니,
음악 소리를 듣고 내려와 춤을 추었다.
18년에 문인(文人) 표상술(表相述)을 오성판윤(五城判尹)으로 삼았다.
20년에 조(趙) 나라 사람 염관(廉冠)이 가족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26년에 송(宋) 나라 사람 황노술(黃老述)의 딸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입국하여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함께 살았다.
30년에 문해광(文海廣)의 필법(筆法)이 매우 뛰어나서 대부열(大夫烈)에 올랐다.
32년에 오추정(吳秋亭)이 그림을 잘 그리므로 문원상서(文院上書)로 삼았다.
33년에 표상술(表相述)이 아뢰기를 “새의 둥지를 뒤집어 놓으면 알이 떨어져 성할 리 없고, 나라가 망한 속에서는 평안한 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타는 집과 새는 배에서 근심을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음식이 떨어져 여러날 굶주리면 병이 나지 않을 몸이 없으니,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입니다.
만일 한번 기울면 사람의 힘으로 갑자기 바로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훌륭한 왕이 기울기 전에 힘쓰는 것은 앞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는 이 말을 따라, 국정을 밝히 살피셨다.
표상술(表相述)의 시(詩)에
외로운 등불은 밤바다를 밝히고
가을비 내리는데 병서만 읽네.
칼을 씻어 석벽에 거니
우레 소리 천지를 진동하도다.
孤燈滄海夜
秋雨讀兵書
洗劍掛石壁
雷聲動天地
35년에 진(晋) 나라 사람 김일선(金日善)이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가지고 조정에 참여하였다.
40년에 제(齊) 나라 상인(商人) 노일명(老一明)이 고급 비단을 싣고와
임금께 바쳤다.
42년 초(楚) 나라에서 망명한 번석문(樊釋文)이 황금(黃金) 40근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4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5세 단제시다.
제 39 세 두홀(豆忽)
―3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달음(達音)을 태자로 삼았다. 연(燕)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2년에 초(楚)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하였다.
10년에 송(宋)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11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13년에 위(魏) 나라와 제(齊) 나라 사절이 왔다.
15년에 진(晋) 나라와 조(趙) 나라 사절이 왔다.
21년 8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30년에 진충노(秦忠老)가 아뢰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에 있는 것이니, 가장 시급한 일은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영재들을 공부하게 하여, 각 부문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중에서 뽑아쓰면, 나라를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게 될 날을 기다리시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렇다 하시고 각종 학교를 많이 세워 백성을 교육하였다.
외국 사람도 와서 유학하는 자가 많았다.
3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6세 단제시다.
제 40 세 달음(達音)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음차(音次)를 태자로 삼았다. 진(晋) 나라 사절이 왔다.
3년에 윤복지(尹卜地)가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5년에 초(楚)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6년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
10년에 진개(秦開)가 치국요람(治國要覽)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7세 단제시다.
제 41 세 음차(音次)
―2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을우지(乙于支)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연(燕)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공상의(孔尙義)가 종교론(宗敎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한(韓) 나라 사절이 왔다.
2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8세 단제시다.
제 42 세 을우지(乙于支)
―1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물리(勿理)를 태자로 삼았다. 정(鄭) 나라 사절이 왔다.
3년에 철인(哲人) 이일선(李一善)이 천리경(天理經)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5년에 백호돈(白好敦)이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치고, 아뢰기를 “우리나라 안에 가는 곳마다 지하에 황금이 있습니다.”하였다.
8년에 임금께서 이일선(李一善)에게 묻기를 “지금 이웃나라와 교류가 전보다 복잡하니, 어떻게 하면 한 눈에 바르고 바르지 않음을 알아서, 원만하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늘에는 음양풍운(陰陽風雲)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사실을 잘 경험해 보면 대강 예측할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성질은 각기 다르니, 상대방의 성질을 확실히 알아내어 교제하면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9세 단제시다.
제 43 세 물리(勿理)
―2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구물(丘勿)을 태자로 삼았다. 제 대부(齊大夫) 전굉(田宏)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2년에 조(趙) 나라 사람 형필(荊泌)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4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8년에 장자학(張子學)이 논리학(論理學=原本 說明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북적(北狄)이 사자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18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 정치가 밝아지고 인심이 화목하여짐으로 내외학문이 몰려들어와, 새로운 사상이 많이 일어나 다사(多事)한 시대가 되었다.
2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0세 단제시다.
제 44 세 구물(丘勿)
―4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여루(余婁)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정(鄭)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3년 2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5년에 최화덕(崔和德)이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7년에 위(魏) 나라 박사(博士) 소문경(蘇文卿)이 입조하였다.
10년에 서백원(徐伯元)이 태야.태음.소양.소음(太陽 太陰 小陽 小陰)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6년에 국학박사(國學博士) 황운원(黃雲元)이 백과서(百科書)를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유종득(柳宗得)이 이재학(理財學)을 만들어 바쳤다.
21년에 적우순(狄于順)이 심리학(心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5년에 홍수가 일어나 밭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38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4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1세 단제시다.
제 45 세 여루(余婁)
―5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보을(普乙)을 태자로 삼았다.
제(齊)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법령을개정하여 천하에 공포하엿는데,
이것을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한다.
6년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10년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종묘)앞에서 솟아나왔다.
12년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마자은(馬子隱)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온천이 성(城)의 남쪽 삼사(三舍=90里)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20년에 정(鄭) 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하였다.
21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23년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로 삼았다.
25년에 크게 가물어 초목이 말랐다.
28년에 장소부(莊召夫)가 의학대방(醫學大方)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0년에 홍문선(洪文善)이 태학조문(太學條文)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5년에 송(宋) 나라 학사(學士) 오문은(吳文偃)이 입경하였다.
40년에 조문휴(趙文休)가 자본론(資本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42년에 노(魯) 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하였다.
45년에 노(魯) 나라 사람 안사득(顔思得)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입경하였다.
48년 8월에 두 개의 해(兩日)가 함께 떴다.
50년에 북견융(北犬戎)이 쳐들어와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52년에 임금께서 중화(中華)에 행차하시어
열국(列國)의 형세(形勢)를 관찰하시고 환궁하셨다.
5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2세 단제시다.
제 46 세 보을(普乙)
―4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고열가(古列加)를 태자로 삼았다.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백두산(白頭山)이 밤에 울고, 천지(天池)의 물이 넘쳤다.
6년에 혼서경(混西經)이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10년에 오성계(吳成桂)가 반역하다가 죽었다.
13년에 장노술(張老術)이 아름다운 옥과 미녀(美女)를 바치니
임금께서 매우 총애하셨다.
15년에 황충(黃虫)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
20년에 정(鄭) 나라 사람 정발(鄭拔)이 음악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23년에 북풍이 크게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다.
28년 4월에 적토우(赤土雨)[주:赤土雨-붉은 흙이 섞인 비]가 쏟아졌다.
30년에 국정이 문란하여 정권이 외척(外戚) 환윤(桓允)에게 돌아갔다.
34년에 궁전이 저절로 무너져 깔려죽는 자가 많았다.
38년에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집 5천여 호가 타버렸다.
46년에 5월에 반역하는 신하 한 개(韓介)가 임금을 죽이고 자립했다.
태자 고열가(古列加=시호는 寧禀離王)가 군사를 이끌고 한개를 쳐 죽이고,
8월 15일에 왕위에 오르니 제23세 단제시다.
제 47 세 고열가(古列加)
―58년간 재위―
2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친히 집행하시니, 외척의 권위를 물리치고 어진 이를 기용하며, 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백성을 다스리셨다.
5년에 견융(犬戎)이 불복(不服)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10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16년에 위(衛)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20년에 풍년이 들고 동해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
22년에 소정국(蘇定國)이 건축학(建築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5년에 구노선(歐老先)이 종수학(種樹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1년에 각처에 신원함(申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자들이 투서하도록 하였다.
40년에 어사(御使)를 시켜 백성들의 사회를 몰래다니며,
부정한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았다.
45년에 연(燕) 나라 대부(大夫) 형운(荊雲)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48년에 선단제묘(先檀帝廟)를 성의 남쪽에 세웠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므로, 종친(宗親) 해모수(解慕漱)[주:解慕漱-북부여의 첫 임금.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의 사이에서 고구려시조 주몽을 낳았다.]가 옛 도읍지 부여(扶餘)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北扶餘)라 하였다.
고조선은 1세 단군부터 47대 고열가임금까지 2096년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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