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참고: <<양가장>>은 송나라때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이야기로 경극, 소설, 드라마, 영화등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양업(楊業)의 본명은 양중귀(楊重貴)이다. 부친인 양신(楊信)은 인주(麟州)의 토호였다. 오대(五代)의 혼란기를 틈타, 인주를 점거하고, 스스로 자사(刺史)라 칭했다. 시국이 혼란스러워 앞뒤로 후한, 후주에 귀부(歸附)했었다. 개략 양신이 후훈에 귀부했을 때, 당시 하동절도사를 맡고 있던 유숭(劉崇)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소년 양중귀를 태원으로 보낸다. 나중에 양신은 후주에 귀부하고 양중귀는 태원에 남는다. 양신이 죽자, 그의 아들인 양숭훈(楊崇勳, 양업의 동생)이 부친을 이어 인주자사가 된다. 그리고 인주는 다시 북한(北漢)의 유숭에게 귀부한다. 그후에 양숭훈이 다시 후주에 귀부한다.
비록 이처럼 여러번 변신하였지만, 오대의 혼란이라는 특수한 시대여서, 양중귀의 태원에서의 생활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소년영웅식의 양중귀는 유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그는 양중귀를 양손자로 맞아 이름을 유계업(劉繼業)으로 바꾸게 한다. 유계업은 보위지휘사를 맡아서, 용맹한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공이 뛰어나 건웅군절도사로 승진한다. 유계업의 전공이 탁월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무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계업은 북한에서 30여년동안 있으면서 쌓은 전공은 망망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묻혀벼 버렸다. <<송사>>와 <<요사>>는 모두 이에 관한 기록이 빠져 있다. <<송사>>에서는 몇 번 유계업과의 전투를 언급하나, 모두 유계업의 패번으로 끝났다고 적혀 있다. 유계업은 송나라장군 당진(黨進)과 태원성아래에서 싸운다. 당진이 적은 병력으로 유계업을 격패시킨다. 유계업은 먼저 호구(壕溝, 해자의 도랑)에 몸을 숨겼다가 성 위에서 내려주는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서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러한 낭패한 전적이 있음에도 왜 그를 무적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속자치통감>>에는 유계업이 태원성에서 겨우겨우 방어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심지어 북한의 왕 유계원이 투항한 후에도 계속 싸웠으며, 송태종이 유계원을 보내어 친히 투항하라고 하고나서야 비로소 대성통곡을 하며 갑옷을 벗고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사서의 기록은 겨우 수십글자이고, 간략하다. 같은 시기의 <<구국지>>에서는 유계업의 공적을 기록한 바 있는데, 유감스러운 것은 이 역사의 기록이 지금은 유실되고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요사>>에는 요나라장군 야율사진이 양업을 문책하며 말하기를: "너는 우리나라와 삼십년을 싸워왔는데, 오늘은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이미느냐"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양업은 북한시기에 주로 요나라와 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북한은 계속 요나라에 신하를 자처했지만, 강성한 요나라는 자주 북한의 경계를 침범했고, 유계업은 북한의 변경수비를 담당했으므로 아마 자주 침범해온 요나라군대와 싸웠을 것이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30여년동안 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경력이 유계업으로 하여금 풍부한 변방경험을 갖추도록 해주었다.
북한이 멸망한 이후, 유계업은 북송에 투항한다. 송태종은 유계업의 위명을 잘 알고 있어, 그를 좌령군대장군, 정주방어사에 봉한다. 유계업이 송나라에 귀부한 후, 원래의 성인 '양'씨를 회복했고, 외자인 '업'으로 하였다. 송태종은 양업이 요나라를 방어하는데 풍부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를 대주로 보내어 반미(潘美)의 지휘를 받게 했다. 요나라대군이 안문관으로 대거 진공하자, 양업은 작은 길로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요나라군대의 배후를 쳤다. 반미의 부대와 앞뒤에서 협공하여 요나라절도사 부마 시중 소졸리를 죽이고, 마보군도지휘사 이중해를 생포하며, 많은 갑옷과 전마를 획득한다. 양업은 공로로 운주관찰사에 오른다.
이후 요나라는 양업의 깃발만 보아도 싸우지 않고 도망갔다. 변방을 지키는 주장수는 양업의 위명을 두려워하여, 여러번 송태종에게 글을 올려 양업을 비방했다. 송태종은 그 상소글을 그대로 봉해서 양업에게 보냈다. 이를 통하여 양업에 대한 신임을 표시한 것이다. 옹희3년, 송태종은 삼로대군을 파견하여 요나라로 진격한다. 그중에는 반미가 서로군의 주장이고, 양업이 부장이었다. 처음에는 각로의 진군이 순조로웠다. 양업의 일로는 요나라의 환, 삭, 운, 응의 4주를 얻는다.
그러나 주력군인 중로의 조빈은 패배한다. 송태종은 각로의 인마들에게 회군을 명한다. 나중에 다시 반미등에게 대군을 이끌고 수복한 4주의 민중을 내지로 이전시키도록 한다. 당시 요나라는 십여만대군으로 이미 반격을 시작했고, 환주를 함락시켰다. 요나라의 병력은 우세했고, 양업등은 그저 민중을 이주시키는데 그쳤으며, 적군과 싸우지는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반미에게 만전의 대책을 건의한다. 양업은 요나라군대와 오래 싸우고, 변방의 지세를 잘 알았으므로 실제상황에 맞게 정확히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호군인 왕선과 유문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나라와 정면으로 싸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업을 겁쟁이라고 조롱했다. 결국 양업은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출정한다. 그는 반미와 약속을 해서, 반미가 요로인 진가곡에 보병에게 활을 가지고 매복하도록 한다. 양업은 이번 길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반미가 진가곡에 매복을 하고 기다린다면, 그래도 이길 희망이 있었다.
양업이 떠난후, 왕선등은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요나라군이 이미 패퇴되었다고 생각하고, 공을 다투기 위하여,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전진한지 얼마되지 않아 양업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황급히 퇴각한다. 양업이 겨우겨우 싸우면서 진가곡에 이르렀는데, 양업은 이미 피로가 극도에 달하였고, 전마도 중상을 입었다. 결국 요나라에 생포된다. 양업의 아들 양연옥(楊延玉), 그리고 부장인 왕귀, 하회포가 모두 전투중에 전사한다. 양업은 생포된 후 항복하지 않고 3일간 곡기를 끊고 죽는다.
양업은 양가장의 제1대이다. 가장 유명했다. 희생도 가장 장렬했다. 양가장의 제2대에서 대표인물은 아들 양연소(楊延昭)이다. 양연소의 본명은 양연랑(楊延郞)이다. 피휘를 위하여 이름을 양연소로 개칭한다. 어려서 양연소는 과묵했으나, 군대작전놀이를 즐겼다. 양업이 본 후에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나를 닯았다" 나중에 출정을 하면 반드시 양연소를 데리고 갔다. 양연소는 이런 환경하에서 훈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성년이 된 후, 직업군인이 된다. 옹희3년의 북벌에 양연소는 부친과 함께 출정한다. 삭주를 공격할 때, 양연소는 선봉이 되어 진격하고, 화살에 팔을 맞는다. 그래도 그는 더욱 용맹하게 싸웠다.
양업이 전사한 후, 양연소는 공봉관에서 숭의부사로 승진한다. 나중에 보주변연도순검사가 되여, 하북의 변방전선으로 부임한다. 북송 함평2년, 요나라가 남하한다. 양연소는 수성(遂城)에 있었다. 수성은 작았고, 방어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요나라군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성안의 인심이 황황하였다. 그래도 양연소는 장정을 모아서, 무기를 주고, 송나라군대와 함께 전력으로 방어했다.
당시는 한겨울이어서, 양연소는 사람들에게 물을 길어 성벽위에 뿌리게 하였다. 하룻밤만에 꽁꽁 얼었다. 성벽은 미끄러워 타고오르기가 어려웠다. 요나라군대의 맹렬한 공격이 계속되질 못했고, 할 수 없이 퇴각한다. 송나라군대는 요나라군이 버리고간 군자물자와 무기를 획득한다. 양연소의 기책으로 수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는 이 공으로 막주자사가 된다.
요나라가 남하할 때, 진정고양관도부서의 직에 있던 부잠은 군대를 이끌고 중산에 주둔하며 나가서 막지를 않았고,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했다. 적극적으로 침범한 요나라군대와 싸우질 않은 것이다. 양연소 및 양사(楊嗣), 석보(石普)등은 여러번 부잠에게 인마를 더 내줄 것과 적극적으로 출병할 것을 요구한다. 부잠은 듣지 않고, 중산에 움츠려 있는다. 부하장수가 나가서 승리하더라도 부잠은 그들의 공적을 덮었다. 나중에 송진종이 보고를 받고는 부잠을 삭탈관직해서 유배보낸다. 송진종은 양연소를 만나보고, 그에게 변방의 책략을 묻는다. 송진종은 양연소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양연소의 행군작전이 부친의 기풍을 물려받았다고 칭찬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많은 상을 내린다.
함평4년, 요나라군이 다시 남침한다. 양연소는 양산에서 정예병사를 매복시키고, 자기는 부대를 이끌고 요나라군과 싸운다. 요나라군을 매복권까지 유인하여 매복병사와 함께 습격한다. 요나라군이 대패했고, 요나라 대장을 죽인다. 양연소는 공로로 막주단련사에 봉해진다. 그와 또 다른 변방의 효장 양사는 함께 이양(二楊)이라고 칭해졌다. 양연소등의 탁월한 전적은 조정의 사람들중에 질시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한다.
송진종은 일찌기 재상에게 "(양)사 와 (양) 연소는 충용으로 힘을 다하는데, 조정에는 질투하는 자가 많다. 짐이 극력 비호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함평5년, 요나라는 보주를 공격한다. 양연소와 양사는 부대를 이끌고 갔는데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요나라의 습격을 받아 손실이 컸다.
송진종은 두 사람이 예로부터 충용으로 유명해서 그들의 죄를 사면한다. 양연소는 여전히 막주단련사를 맡았다. 함평6년, 양연소는 다시 연변도순검이 된다. 나중에 녕변군부서로 옮긴다. 경덕원년, 송진종은 양연소의 병마를 만이상으로 늘여준다. 요나라가 침범하면 정융군의 동쪽에 주둔하고, 그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권한을 준다. 도부서 왕초의 지휘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다. 전주지역에서는 양연소가 화의에 반대한다. 그는 글을 올려: "거란이 전연에 머물고 있는데, 북쪽 경계에서 수천리나 떨어져 있다. 인마가 모두 피곤하다. 비록 무리는 많으나 쉽게 이길 수 있다. 용감하게 공격하고 솔선하여 나서서 요로를 차단하면, 무리들을 섬멸할 수 있다. 그러면 유주, 역주등의 수개주를 취할 수 있다." 양연소의 주장은 당시 구준의 주장과 맞았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양연소는 스스로 인마를 이끌고 요나라의 경내로 들어가서 몇개의 성을 함락시킨다. 이후 전연의 맹이 이루어진다. 양연소는 변방수비의 공로로 계속 승진한다. 경덕2년, 고양관부도부서를 맡는다. 양연소는 대중상부7년, 임지에서 사망하니 향년 57세이다. 송진종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 하며, 사자를 보내어 영구를 호송하게 한다. 하삭의 백성도 많이 따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북송 조정은 양연소의 세 아들에게 관직을 주고, 양연소의 문객들중에 능력있는 사람을 골라서 관직을 준다. 양연소는 용감한 장군이었다. 하사받은 것은 모두 부하에게 나누어주었다. 선공후사. 본인은 아주 검박하게 살앗다. 명령은 분명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동고동락했으니, 양업의 가풍을 이은 것이다. 양연소는 매번 전투마다 솔선수범했고, 공을 세우면 부하들과 나누었다. 그리하여 부하들도 기꺼이 그를 위해 싸우고자 했다. 양연소는 변방을 20여년간 지킨다. 요나라도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를 양육랑(楊六郞)이라고 불렀다. 양연소는 마침 북송이 요나라에 대하여 방어하는 시기에 살았으므로 송나라를 보위하는데 공을 세운다. 백성의 존경을 받아 양가장의 위명을 이었다.
양문광은 양연소의 셋째아들이다. 양문광은 장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전직(殿直)의 관직을 받는다. 나중에 섬서에 가 있던 범중엄과 만난다. 범중엄은 얘기하는 과정에서 양문광의 재능을 알아본다. 그리하여 그를 곁에 둔다. 적청(狄靑)이 광서를 정벌하러 갈 때, 양문광이 따라간다. 이때의 양문광은 아직 무명지배였다. 평중을 다스릴 장수를 구할 때, 송영종은 양문광이 명문의 후예임과 공로를 생각하여 양문광을 성주단련사, 용신위사상도지휘사, 천흥주방어사, 진봉로부총관으로 삼는다. 그는 이때부터 서하에 대한 방어작전에 참가한다. 한기는 양문광으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필속에서 성을 쌓게 하고, 요로를 지키도록 한다. 양문광은 먼저 분주에 가서 성을 쌓겠다고 말하고, 신속이 군대를 이끌고 필속으로 간다. 황혼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밤을 새워 성을 수리하고, 전투준비를 마쳤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서하의 기병이 도착한다. 송나라군대가 유리한 지형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할 수 없이 퇴각한다. 양문광은 기회를 틈타 장수를 보내어 습겨한다. 그리하여 적군을 많이 죽이고 잡는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치하한다. 상도 많이 내린다. 그리고 그를 경주진융군, 정주로부총관에 임명하고, 보군도우후로 삼는다. 요나라와 송나라는 대주의 변방경계선 문제로 싸움이 일어난다. 양문광은 조정에 지도를 올려 유연을 빼앗을 계책을 올린다. 그래도 조정에서든 답이 없었다. 양문광도 임지에서 죽는다. 북송조정은 그에게 동주관찰사의 직위를 내린다.
사실 역사에는 사태군(?太君)도 없었고, 양종보(楊宗保)도 없으며, 목계영(穆桂英)도 없다.
양업을 해친 것은 왕선이지 반미가 아니다. 왕선은 소인이고, 주장을 모함함으로써 관직을 얻었다. 아마도 왕선의 관직이 너무 작아서 양씨집안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반미가 억울하게 악명을 덮어쓴 것이리라.
양연소를 양육랑이라고 칭하는데는 이런 전설이 있다. 양연소는 양연의 여섯째 아들이 아니라, 장남이다. 그러나, 요나라사람들은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있는데 여섯째 별이 요나라에 극성이라고 한다. 양연소가 요나라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었으므로 요나라사람들은 그를 여섯째 별이 세상에 난 것이라고 보아, 양육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오래전 서양에서 만들어진 조선의 영토... (0) | 2016.02.20 |
---|---|
[스크랩] 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0) | 2016.02.20 |
[스크랩] 아메리카는 조선의 속국이었다 (0) | 2016.02.20 |
[스크랩] 나는 한국의 후손이다.‘일본천황의 고백` (0) | 2016.02.19 |
[스크랩] 한국 근대사 귀한사진 (0) | 201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