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역사고증에 의한 실화입니다...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수백 년을 이어가는 유럽 세계 팽창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닿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결국,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발, 70여 일의 항해 끝에 마침내 지금의 카리브 연안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도착한 곳이 새로운 대륙이 아니라 아시아의 어디 쯤이라고 믿었다 한다. 사실은 그가 미 대륙에서 만났던 어떤 한 사람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에 의해 이미 미 대륙은 발견 되었고, 콜롬부스라는 이름 역시 사실은 그 사람이 지어준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본지 역사 고증 팀이 스페인 왕립도서관에서 발굴한 한 고문서로 인해 밝혀졌다. 서사시로 기술한 이 문서는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모험심과 웅대한 기개를 표현하고 있다. 본지 자료실에 보관 중인, 조선 9대왕 성종(1469-1494)때 집현전에서 발간한, 당시의 사건기록을 담은 희귀도서인 "사건 과실화(事件過悉禍)" 맨 마지막 장에 있는 "행불자 명단"에서도 박규는 실존 인물로 확인되고 있다. 함을 주장하던 차에, 성종 14년(1482)에 혼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갔으나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더라." 어느 날 새벽 드디어 뭍에 닿게 된다.홀홀단신으로 미지의 대륙에 도착해 황망한 중에도 박규 장군은 한 편의 시조로 그 감흥을 읊어내는 풍류정신을 잃지 않았다. 라 칭하고, 박규 장군이 최초 도착했던 지역을 <로수안절래수>라 불렀다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 으로 쓰이고 있는 <아메리카로 떠나라!>는 뜻의 어원 역시 이 시조가 되겠다. 장군을 현지 원주민 처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모했다 한다. 그 역시 외로움을 오로지 달달이만 으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현지 원주민 처녀들과의 애틋한 사랑을 다소 에로틱한 한 편의 시로 기록해 놓기도 했다.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자식들에게 모두 호부호형을 허하였으니, 그 계급타파 의지와 사해동포정신은 칭송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미 대륙 역사상 가장 용맹한 부족이었던 아파치족은 바로 그렇게 태동하게 된다. <기수마이애수>라고 읊조리는 구애의 상용구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 여자는 새침떼게 등을 돌리고 있다가 애수홀, 애수홀 하고 화답하는 것으로 사랑을 허락했다. 훗날 이렇게 남자가 무릎 꿇고 여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인디언들의 구애행위를 멀리서 목격한 무식하고 미개한 양넘들은 남자가 엉덩이에 키스했더니 여자가 거기가 아니구 정확하게 똥구녕에 해줘.. 하고 화답한 것으로 오인해 만들어진 말이 바로 되었고, 박규 장군은 오래지 않아 수만 필 이상의 말과 수천의 처자를 거느리며 미 대륙을 호령 하게 되니, 이들 원주민 인디언들은 수만 필의 말을 소유한 박규 장군을 숭상하여 그를 "말을 많이 소유한 박씨 성을 가진 위인"이라 하여 마다박가(馬多朴家)라 불렀다. 뜻으로 폄하하여 마다박가(馬多朴家)를 썼으니 하고 있던 터, <박규표류기>에 따르면 그는 죄를 지은 자를 조선시대의 형법에 따라서 처벌 하였다고 한다. 내려지는 가중처벌이 있었으니 죄인을 묶어놓고 후장을 발로 걷어차는 형벌이었다. "발을 더하라!" 구령에 따라 행해졌기에 이를 "족가"(足加)라 불렀다. 형벌은 다섯 손가락 중에 으뜸으로 긴 가운데 손가락을 죄인의 후장에 대고 다른 이가 이를 발로 차서 어퍼컷을 먹이는 끔직한 형벌이었다 한다.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에 그 참상이 끔직하다 하여 15대 광해군때 이르러 전면 폐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끊임없이 전래되어 현재의 국민스포츠인 똥침으로 정착되었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표현으로 정착되었고, 이것이 양넘들에게 전파되어 상대를 위협 하고자 할 때, 박규 장군이 두렵지도 않냐는 뜻으로 박규장군의 이름을 높이 외치며 가운데 손가락을 휘두르는 바짝 마른 놈 하나를 포박해 두었으니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지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박규 장군은 친히 심문하러 달려가, 굶고 지쳐 피골이 상접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 못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짝달막한 그 사람을 보고 나직하게 이렇게 읊조렸다 한다. 차리게 하라. 지켜본 인디언들은 그 남자를 <거리수토부 골음부수>라 불렀고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취했으며, 인디언들은 <골음부수>처럼 키가 작고 상황파악 못하는 사람을 보면 <조온마난색기>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공명심에 그만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은인 박규 장군을 배반하기에 이른다.이 신비의 미 대륙을 자신이 발견한 것인 양 하여 영웅이 되고 싶은 욕심에 대서 사시 <박규 표류기>를 훔쳐 야심한 밤에 도주하게 된 것이다. 물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야반도주한 <골음부수>를 한탄하며, 자연과 벗하며 결코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어부나 되어 살지 않고선... 이라며 자신의 무위자연사상을 담아 이렇게 안타깝게 일갈한다. 이것이 양념들에게 전파되어 가 도난 당해 더 이상 기록이 없다. 웅대한 기개와 아량을 잊지 못하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배반한 죄책감으로 인해 심히 괴로워하다가,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돌아오길 3차례나 더하였으나 끝내 원래 그 곳을 찾지 못한 체 어떤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시작했고,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일상어조차 박규 장군의 유려한 시어들에서 빌어온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미국 노무 쉐이들이 최근 들어 그 역사를 망각하고 감히 어른의 나라에서 폭탄을 아무데나 떨어뜨리지를 않나 물에 독극물을 뿌려대지 않나, 겨우 한국의 속국이었던 미국이 이 지랄을 하는 데도 모가지 힘도 한 번 제대로 못 주고 질질 끌려 다니는 정부는 하늘에 계신 박규 장군께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당당히 얻고, 주장할 것이 있으면 당당히 주장하여야 하는 법이거늘, 언론이라고 하는 것들도 제대로 항의와 주장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미리부터 '이 사태가 반미감정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느니 지레 꼬리를 말아버리는 빙신같은 작태를 목도한 본 역사 고증 팀은 미국 넘들이 대구리 숙이고 정식으로 사죄할 때까지 박규 장군의 이름을 높이 외치며 족가지마의 형벌을 연속 콤비블로우로 미국 넘들에게 내릴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역사적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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