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제(齊)나라 때 술에 도통한 순우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제나라 위왕(威王)이 순우곤을 불러 “어떻게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인가?”고 물었다.
그는 술도 벼술처럼 품작(品爵)이 있다고 대답하고 그 순서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一品 :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홀로 마시는 술
二品 :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지인과 마주하는 술
三品 : 사랑채에서 홀로 마시는 술
四品 : 사랑채에서 지인과 마주하는 술
五品 : 기생집에서 풍악을 울리며 마시는 술
六品 : 여럿이 술집으로 몰려 가 왁자지껄 마시는 술
七品 : 잔칫집이나 상가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려 마시는 술
八品 : 공적인 일로 만나 공석에서 돌려 마시는 술
九品 : 웃 어른이나 임금앞에서 엎드려 마시는 술
퇴계 이황은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 하며 밤을 지새워 시정(詩情)에 취하였다 하고,
성종때 재상 신용개(신숙주의 손자)는 달 뜨는 밤 국화분(菊花盆) 사이에
술상을 놓고 국화를 벗 삼아 취하도록 마셨다고 하였으니
이들이 1품 술을 마셨다고 하겠다.
한편, 초(楚)나라의 침략을 받은 위왕은 언변이 좋은 순우곤을 조(趙)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했다. 순우곤이 10만의 원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초나라 군사들은 밤중에 철수하고
이에 전화(戰禍)를 모면한 위왕이 이를 치하하여 주연을 베풀며 순우곤에게 물었다.
"그대는 얼마나 마시면 취하는고?"
"신(臣)은 한 되를 마셔도 취하고 한 말을 마셔도 취하나이다."
"허, 한 되를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어찌 한 말을 마실 수 있단 말인고?"
"예, 경우에 따라 주량이 달라진다는 말씀이옵니다.
만약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마신다면 한 되도 못 마시고 취할 것이오며,
근엄한 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마신다면 자주 일어서서 잔을 올려야 함으로 두 되도 못 마시고
취할 것이옵니다.
옛 벗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마신다면 그 때는 대여섯 되쯤 마실 수 있을 것이오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쌍육(雙六/주사위 놀이)나 투호(投壺/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기)를 하면서 마신다면 그 땐 여덟 되쯤 마시면 취기가 두서너 번 돌 것이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술도 거의 떨어지게 되어 취흥이 돌면 남녀가 무릎을 맞대고 서로의 신발이
뒤섞이며 술잔과 그릇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며(배반낭자/杯盤狼藉), 집안의 등불이 꺼질
무렵, 안주인이 손님을 돌려 보낸 뒤 신(臣) 곁에서 엷은 속적삼의 옷깃을 풀어 헤칠 때 색정적인
향내가 감 돈다면 그 때는 한 말이라도 마실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순우곤은 주색을 좋아하는 위왕에게 이렇게 간했다.
"전하, 술이 극에 달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데 만사가 모두 그와
같사오니(酒極則亂, 樂極則悲, 萬事盡然) 깊이 통촉하옵소서!"
순우곤의 간언(諫言)을 들은 위왕은 이후 주색을 삼가고 순우곤을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관리
의 우두머리로 삼아 왕실의 주연이 있을 때는 꼭 곁에 두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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