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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전쟁사]14. 콘스탄티노플의 최후 - 비잔틴 제국 vs 오스만투르크

arang 2519 2014. 5. 24. 12:47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7506&leafId=257



19세기에 그려진 코소보 전투도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하여 출정하는 메흐메트 2세


서로마와 동로마

역사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 476년, 서로마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가 고트족 군장인 오도아케르에게 황위를 넘긴 때를 로마제국 멸망의 순간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뛸 것이다. 서로마의 황위가 ‘야만족’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제국 동부의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의 나라를 ‘로마니아(Romania)’, 즉 로마인들의 땅이라고 여겼다. 서로마의 멸망은 이들에게 있어 단지 야만인들에 의한 제국 서부영토의 침탈이었다. 서로마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일 뿐이며 언젠가는 무력으로 회복해야 할 ‘고토’였다. 아울러 동쪽의 ‘로마노스’들에게 있어 제국의 수도는 로마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었고 이때문에 로마제국의 정통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흔히 서양사에 있어 로마를 천년 제국이라 하지만 동로마까지 포함하면 20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사면초가와 말기현상

동로마의 황제들 중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황제들은 많지만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상당부분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또는 동로마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리우스 2세를 제외하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주변 지역을 군사적 문화적으로 압도하던 서로마와는 달리 동로마의 국제정치적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아랍제국, 불가르 왕국, 흑해 건너의 루스 세력 등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세력은 너무 많았다. 심지어 13세기에는 같은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자칭 라틴 왕국이 세워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논자(論者)들이 하나의 왕조가 멸망할 때는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일반적으로 ‘말기현상’이라고 하며 대개는 정치와 관계(官界)의 부패, 군사상의 약세, 사회적 혼란, 그리고 심지어 초자연적 현상까지 기록된다. 어떤 나라건 그냥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이유가 있어서 망한다는 논리이다. 특히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하늘이나 전능(全能)한 신들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천명(天命)론, 또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의하면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왕들이 잘못해서 하늘의 노여움이나 신들의 벌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에 멸망한 모든 왕조들은 ‘응당’, 또는 마땅히 망했어야 했으며 그 왕조가 지속되었으면 ‘천하’또는 ‘세상’에 크나큰 해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기현상’은 논리적인 근거가 확실치 않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해당 왕조가 멸망한 다음에 나타난 왕조에 의한 정치적 정당화인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나타난 사건을 꿰어 맞추어 그저 ‘그럴듯한’ 사건의 연속을 만들어낸 것뿐이다. 이 때문에 말기현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전 왕조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도덕적 타락상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약해져 멸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당위적 결과론에 불과하다. 어떠한 논자는 그 논리를 오히려 뒤집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탐식, 과음, 엽색에 의하여 정치체가 붕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회적 붕괴에 따른 현상은 그 몰락의 규모에 맞먹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위층의 도덕적 타락은 언제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타락은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었으며 다만 국가가 어려워질 때 부각이 되는 것뿐이다. 타락 때문에 그 국가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정치사회적 타락을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약화된 것이다. 국가가 멸망하는데는 단순히 상층부의 도덕적 타락이나 피상적인 사회적 혼란이 아닌, 그 이상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기현상’의 관점으로 보자면 동로마는 망해도 여러 번 망했어야 하는 나라이다. 7세기 초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앞마당까지 왔고 7세기말-8세기초에 걸쳐 아랍인들이 레바논과 시리아 등 중요한 영지를 모두 잃고 콘스탄티노플이 두 번이나 대군에 포위당하였다. 10세기 중반에는 불가르족이 크게 세력을 떨치면서 발칸반도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1세기말에는 투르크족에게 크게 패하면서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가 거의 모두 상실되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유능한 군주의 등장이나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인하여 멸망하지 않고 기사회생하였다. 동로마의 예를 보더라도 어떤 나라가 망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어떤 나라건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 위기를 넘기면 나라가 존속되고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뿐이다. 여기에 필연적 운명이나 당위적 논리를 운운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14세기말,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용케 살아남았던 동로마는 투르크에게 몰려 멸망직전에 와있었다.

오스만의 흥기와 동로마의 쇠퇴

셀주크 투르크 제국 최대판도와 단다나칸 전투(1040) / 만지케르트전투(1071)

지금의 터키를 세운 투르크의 역사는 몽골 서부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사의 척발씨, 사타, 돌궐, 중앙아시아와 대초원 지대의 캉리, 쿠만, 킵차크, 하자르, 페체네크 등이 모두 투르크 계통이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현재 중국 북부에서 트란스옥시아나(현재 시르-다리아/아무-다리아강 유역의 땅)까지에 걸쳐 크나큰 제국을 이룬 투르크족은 이후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서부의 투르크인들이 중동지역으로 진출하여 11세기경 동로마와 아나톨리아를 놓고 충돌하게 된다. 이들은 역사에서 ‘셀주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들은 약 10세기경 아랄해 인근에 살고 있던 오구즈-투르크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하게 된다.

사실 돌궐, 즉 서돌궐 제국을 구성하던 인원들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이전에도 중동에는 많은 수의 투르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이란을 다스리던 페르시아 계통의 왕조에서 복속민으로 있던 일군(一群)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즈니(Ghazni)라고 불리며 10세기경에 사마니조(朝) 페르시아를 전복시키고 이란 서부에서 아프간, 그리고 인도 북부에 걸친 가즈나 왕국을 세웠다. 카자흐에서 남하하는 셀주크 집단은 1040년에 현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메르브 인근의 단다나칸에서 이 가즈나 왕국의 군대와 격돌하였고 가즈나 왕국군이 대패하면서 그 영토는 인도 북부로 수그러든다. 가즈나비를 쳐부순 셀주크는 향후 20년에 걸쳐 이란 북부의 호라산과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하였다. 1060년대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맞물리는 지역인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조지아)까지 진출한 셀주크 세력은 동로마와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1071년 반(Van)호수 인근의 만지케르트에서 내부의 정쟁(政爭)으로 약화된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디오게네스의 동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서 동로마제국의 농지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아나톨리아가 상실되었고 동로마는 예전의 강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셀주크는 현재의 터키에서 아라비아 반도 남부, 그리고 아랄해 지역까지 아우르는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셀주크 제국은 12세기 중반까지 번성하였으나 유럽인들에 의한 대대적인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이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국력을 소모하게 되고 이후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코레즘 세력에 패한다. 설상가상으로 각 지역을 맡고 있던 제후들(베이)이 독립하면서 제국은 사실상 와해되고 지금의 터키의 룸-셀주크만 남게 된다.

오스만 1세의 초상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오스만 제국의 창업주인 오스만의 아버지는 원래 아나톨리아 동부의 군장(베이)이었으나 당시 중동을 휩쓸고 있던 몽골군의 무자비한 칼을 피하여 부족들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동부로 가서 룸-셀주크의 술탄 휘하에 들어간다. 술탄은 오스만의 아버지인 에르투그룰에게 동로마와의 접경지대를 하사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는 적국과의 접경지역을 받은 것은 불만사항일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술탄은 에르투그룰이 동로마와 싸워 얻은 땅은 그대로 가지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의 베일릭(베이의 영지)을 물려받은 오스만 역시 몽골군의 침입에 따른 혜택을 받는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몽골군의 철권통치를 피하여 아나톨리아로 들어온 이슬람 전사들이 그 휘하에 모여든 것이다. 오스만은 이들을 기반으로 군세를 확장하여 터키 서북부에 남아있던 동로마 영토를 잠식하였고 1302년에 동로마군은 바페우스에서 크게 이기면서 동로마의 영역이었던 비투니아 전부를 자신의 영역에 편입하였다. 그 뒤로도 동로마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중요도시인 에베소를 차지하였다.

오스만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 최대의 도시인 브루사를 공격하였으나 아직 그의 군이 공성전에 서툴렀던 까닭에 함락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오스만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오르한이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아 1326년에 브루사를 함락시켰다. 브루사는 이후 새로이 형성된 오스만 투르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1세 사망 당시의 영토와 오르한 1세가 정복한 영토

브루사의 함락으로 인하여 동로마의 아나톨리아 영토는 거의 상실되었다. 아나톨리아 서쪽 끝의 동로마 영토를 모두 차지한 오르한은 마르마라해(海)를 건너 게리볼루(갈리폴리) 반도 이북의 땅도 차지하였다. 오스만 왕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룸의 술탄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였다. 사실 동로마는 앞서 말한 만지케르트에서 패한 후로 예전의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약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1204년에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출정한 4차 십자군이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 등 우환이 겹쳤다. 다만 1200년대 중반에 유능한 황제인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의 등장으로 약간 세력회복을 하면서 지금의 불가리아/알바니아에서 터키 중부까지 회복하였으나 예전 바실리우스 2세 때의 강성함에는 못 미쳤다. 그나마 미카엘 팔레올로구스가 이룬 중흥도 오래가지 않았다. 1305년에 불가르족의 침공이 이어졌고 트라키아(지금 터키 공화국의 유럽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에 의한 팽창이 이어지며 브루사를 비롯하여 아나톨리아 서부의 나머지 영토를 빼앗긴 것은 매우 중대한 타격이었다. 제국의 중심영토였던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상실한 동로마는 오스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오스만군이 마르마라해를 건너 유럽영토까지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동로마의 멸망은 불가항력인 것으로 보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남유럽 정복

그러나 오르한의 뒤를 이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된 무라드는 동로마를 직접 치는 대신 발칸반도 깊숙이 진격하였다. 수도를 아드리아노플(현재 터키영토 최북단인 에디른)으로 옮긴 무라드 1세는 1371년 세르비아왕 부카신과 왕제(王弟) 우글리에사가 아드리아노플을 찾기 위하여 일으킨 세르비아 원정군을 격파하고 1385년에는 현재의불가리아 수도인 소피아를 점령하였다. 1386년에는 세르비아의 대영주인 라자르 레블리야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과 사힌-베이의 오스만군이 프로츠니크(현 세르비아 남부 프로코피예市 인근)에서 격돌하여 오스만군이 패하였다.

오스만군의 진격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1389년에 세르비아 전국에서 모인 왕군(王軍)과 오스만의 대군은 코소보에서 대회전(大會戰)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양군 모두 처절히 싸웠고 병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세르비아군을 이끈 레블리야노비치와 오스만 투르크 술탄 무라드 1세 둘 다 목숨을 잃었다. 세르비아의 군사력은 소진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큰 타격을 입은 오스만군의 진격도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던 병력을 불러올 때까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동방에서 병력을 불러온 오스만투르크의 새로운 술탄인 바야제트는 다시 팽창을 재개하였고 세르비아는 오스만투르크의 후국(侯國)이 될 수밖에 없었다. 1393년과 1394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길목에 요새를 구축하여 동로마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였고 1395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의 숨통을 끊으려 한 것이다. 물론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을 공략하는 과정이 수월하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1395년에 잠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지금의 루마니아 동부에 있는 작은 왕국 왈라키아를 정벌하여 동로마 공격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사전에 제거하려 하였다. 4만의 군대로 쳐들어갔으나 로비네의 전투에서 불과 1만의 왈라키아군에게 격퇴당하였다.

왈라키아에서 일격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의 팽창에 역시 영토를 잠식당하고 있던 불가리아가 영토를 되찾고자 하였고, 투르크군을 한차례 물리친 왈라키아를 비롯하여 동유럽의 영주와 군주들도 오스만을 물리쳐 그 위협에서 벗어나는데 불가리아와 이해를 같이 하였다. 이탈리아의 양대 상업도시인 베네치아와 제노바 역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에서 자신들의 상권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남유럽-동유럽에서 형성된 반 오스만 동맹에 힘을 보태었다. 헝가리도 국경에 가까워지는 오스만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오스만에게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잃고 소국(小國)으로 전락한 동로마는 유럽의 손을 빌려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 하였다. 서방교회는 이때 로마(보니파시오 9세)와 아비뇽(베네딕토 13세)에 있는 두 명의 교황들이 서로가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분열되어 있었다. 로마의 교황인 보니파시오 9세는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투르크 이교도를 물리쳐야 한다며 성전을 선포하였고 서로 이권을 노리는 유럽국가들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투르크와 싸우기 위하여 프랑스, 헝가리, 신성로마제국 각 영지, 몰다비아, 아라곤등지에서 병력을 보내왔고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박을 동원하여 이 ‘십자군’을 싸움터까지 실어 날랐다.

이에 맞서는 투르크군은 술탄인 바야제트 1세가 지휘하고 있었고 그의 제후국이 된 세르비아의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병력을 이끌고 투르크편에 참전하였다. 바야제트 1세는 7년전 아버지 무라드 1세가 코소보 전투의 막바지에서 세르비아 암살자에게 피습을 당하여 죽은 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형이나 무라드 1세의 장자(長子)인 야쿠브를 지휘천막으로 끌어들인 다음 목졸라 죽임으로써 술탄이 된 인물이었다. 일부 유럽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20만이 넘었다고 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패배가 불가항력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며 실제 병력은 마찬가지로 3만에서 4만 사이로 추정된다.

중세에 그려진 니코폴리스 전투도

프랑스의 디종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를 거쳐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인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니코폴리스 요새를 포위하였는데 이는 니코폴리스가 발칸반도 내륙에서 흑해지역을 잇는 중간 요충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십자군이 니코폴리스를 차지하게 되면 도나우강 하류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고 투르크의 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위협할 수 있으며 콘스탄티노플 지원을 위한 수로와 육로를 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록 수송수단이 없어서였기는 하지만 요새 공략을 위한 공성무기를 가져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사방이 낮지만 가파른 벼랑으로 되어있는 니코폴리스 공략에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수 차례의 공략에 실패한 십자군은 결국 니코폴리스를 포위하여 굶기는 고사(枯死)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군을 이끌고 니코폴리스 요새의 구원에 나섰고 투르크군이 요새 인근에 이르자 십자군은 포위를 풀고 야전을 준비하였다. 1396년 9월 25일에 벌어진 전투 초반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투르크군의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투르크 보병을 공격하여 돌파에 성공하여 도망치는 투르크 보병들을 뒤쫓으면서 십자군이 우세를 점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격에 나선 프랑스 기마들 상당수가 투르크군이 설치한 꼬챙이에 꿰이고 투르크 궁병의 사격으로 십자군 역시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노련한 기사들은 일단 서전을 이겼으니 뒤에 대기하고 있던 헝가리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폈으나 전공(戰功)에 눈이 멀어있던 젊은 기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하였다. 그러나 기사들이 후퇴하는 투르크 보병을 쫓아 인근의 고지를 올라갔을 때 그 곳에는 바예지드가 예비대로 두고 있던 중갑기병대(시파히)가 대기하고 있었고 시파히들의 돌격이 이어지면서 프랑스군의 정예들은 모두 쓰러지고 그 지휘관인 네베르는 사로잡혔다. 시파히들은 고지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십자군 진영을 그대로 치는 것이 아니라 양 옆으로 돌아 포위하고자 하였고 이를 신성로마의 기사들이 막으려고 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투르크군에 참전하고 있던 라자레비치의 1500기사에 의한 돌격이 이어지면서 신성로마군이 무너지고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병력들은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철수하였다. 로도스 기사단과 그 단주인 시기스문트도 열심히 싸웠으나 기울어진 싸움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로서 중동에서의 십자군 원정이 끝난 이후 최대 규모의 십자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고 동로마 제국의 운명은 경각에 처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장자(長子), 이슬람의 전사

오스만 투르크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자리잡으면서 정착 국가를 세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근본은 기마민족이었다. 터키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마르마라해를 넘어 남부 유럽으로 진격하던 시기에도 주축은 궁기병과 함께 술탄 휘하의 영주들이 거느린 중갑기병이었으며 보병은 대개 급히 동원되었거나 점령지에서 징집한 장정들을 급히 훈련시켜 선봉으로 내세웠고 이 때문에 그 전투력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남부 유럽 대부분을 차지한 후에도 투르크 술탄의 주력군은 여전히 제후(베이)와 군장(아미르)들로부터 지원받은 기마군이었다. 그러나 비잔틴과 유럽인들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공성전, 그리고 대규모 보병과의 전투를 많이 겪게 되었고 보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울러 초기의 오스만 투르크군은 공성전에 약한 모습을 보였고 니코폴리스의 전투를 비록 이기기는 하였지만 초반에 선두에 내세웠던 보병들이 무너지면서 잠시 어려운 싸움이 되기도 하였다.

1522년 로도스 섬을 공격하고 있는 예니체리 병사들

보병의 수를 충당하기 위하여 오스만 투르크 술탄인 무라드 1세는 유럽인들과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와 노예들을 훈련시켜 기존의 주력군과 대비되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는데 기마군은 ‘카피쿨루 수바리’가 되었고 보병은 신군(新軍), 즉 새로운 군대란 뜻의 예니-체리(Yeni Ceri)가 되었다. 예니체리는 영어권에서 부르는 ‘재니서리(Janissary)’란 명칭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다. 무라드 1세가 새로운 군단을 만든 까닭은 영주들과 자치권을 가진 군장들의 병력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바꾸어 술탄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는 글자 그대로의 중앙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전쟁 포로들과 노예들을 훈련시키는 제도가 계속되다가 얼마 후 ‘데프시르메’라는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었다. 이는 새로이 점령되어 술탄이 직접 임명한 베이(Bey)들이 있는 발칸반도에서 주로 시행되었고, 정해진 지역 내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다소 낮은 세금을 내는 대가로 5년마다 기독교 가정 40호(戶)중 한 명이 맏아들을 내놓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매년 다른 지역에서 약 1000명에서 3000명의 어린 소년들을 받아들였다. 도시지역의 청소년들은 세속에 물들었다고 제외되었고 장인들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역시 제외되었다.

이 소년들은 단체로 시험을 보았고 성적 우수자들은 “이츠-오글란”이 되어 술탄의 궁정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일단은 문학, 수학 등의 종합교육을 받은 다음 각종 무예(검술, 창술, 궁술, 레슬링)와 종교적 교육을 받았다. 우수자는 술탄의 궁정으로 가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엘리트 기병인 카피쿨루 군단이 되었다. 이츠-오글란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아체미-오글란이라고 불리는데, 일단 지방토호들의 집으로 보내져 농사를 짓고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종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병영으로 보내어져 공동으로 생활 하면서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일반적으로 ‘예니체리’라고 하면 아체미-오글란 출신의 보병들을 가리킨다. 이중에서도 우수자 들은 근위대인 ‘보스탄치’ 군단에 입대하였다.

훈련과정에서 기독교인 아이들은 철저한 무슬림으로 교육되었고, 술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였다. 유럽이 아직도 봉건적인 군대에 의존할 때 등장한 예니체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정규병’에 상당히 가까웠다. 중앙정부와 군주에게만 충성을 하였고 정기적인 급료를 받았다. 그리고 평시에는 치안과 소방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여 가정도 꾸리면서 연금을 받아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자신들의 자식을 데브시르메에 내보내는 기독교 가정도 있었으며 나중에는 무슬림 가족들도 예니체리를 출세의 길로 인식하고 자식들을 예니체리로 만들기 위한‘로비’를 하였다. 예니체리 군단 내에 무슬림의 숫자가 늘면서 데브시르메는 1683년에 폐지된다. 나중에는 예니체리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들을 입대시키는 인척주의가 횡행하여 예니체리 군단은 상당히 부패하였고, 결국 1826년에 예니체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부패와 인척주의가 만연하기 이전 예니체리는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였다. 싸움에서는 적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후퇴할 때도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아울러 많은 수의 유럽 국가들이 아직도 창칼로 전쟁할 때 이미 총기를 개인무장으로 채택하였다. 1500년대 예니체리 보병들의 기본무기는 총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술탄 메흐메트는 일종의 폭력배집단인 바시-바주크들을 앞에 내세워 총알받이로 쓴 다음, 바시-바주크들이 전멸하자 예니체리들을 투입하였다. 그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예니체리들은 빗발치는 화살과 탄환 속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진군하였고 동료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바로 그 자리를 채웠다 한다. 그리고는 성벽에 다가와 침착하게 사다리를 놓았다. 비록 성벽을 넘지 못하고 물러나기는 했지만 기존의 군대와는 여실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1400년경 동로마의 영토

티무르가 구원한 동로마

비록 2만에서 3만에 불과하였지만 거의 전 유럽이 반 투르크의 기치하에 연합한 십자군이 니코폴리스에서 참패하자 동로마에게 구원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1396년의 십자군 자체가 동로마의 구원요청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각 왕국, 특히 서유럽의 왕국들이 승산 없는 싸움에 다시 병력을 내어줄 리가 만무하였고 그나마 병력의 여유가 있는 프랑스는 비록 일시 휴전 중이기는 하지만 잉글랜드와의 100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나설 수가 없었다. 동로마와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싸운다지만 서유럽의 주요세력들은 당장 자국에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려하였다. 아울러 이 당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왕권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 국왕들이 전쟁에 나가라고 하여도귀족들이 즉각 나서는 것도 아니었다.

니코폴리스에서 대승을 거둔 바야제트는 콘스탄티노플을 더욱 더 옥죄었다. 구원군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구원은 유럽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왔다. 이때 파리에서 서유럽의 군주들에게 재차 구원을 호소하고 있던 동로마의 황제 마누엘 2세는 티무르라는 무자비한 정복자가 중동을 무자비하게 휩쓸었으며 바그다드와 시리아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울러 아나톨리아 동부의 베이(영주)들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바야제트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고 있음을 알고 티무르를 동로마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마누엘 2세가 티무르에게 사신을 보낼 당시 티무르는 복속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반기를 든 기독교 국가들을 다시 치고 있었다. 사실 티무르는 무슬림과 크리스찬들을 가리지 않고 짓밟은 무자비한 점령자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였지만 2000년을 이어온 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동맹의 상대가 누구인지 따질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1399년에 티무르는 대군을 휘몰아 그의 도성인 사마칸드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충차, 투석기와 화염차 등 최신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기독교 왕국인 그루지아의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그루지아를 마구 짓밟은 티무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야제트에게 신속(臣屬)한, 오스만 제국의 동쪽 변경에 있던 시바스(현재 터키 동부의 도시)를 함락시키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자신의 군에 맞서 싸운 적병들은 모두 산채로 매장시켜 버렸다. 티무르와 바야제트는 서로가 ‘이슬람의 수호자’임을 자임하고 있었고 자신들보다 더 위의 정복자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티무르와 바야제트간에 싸움을 붙이려는 마누엘 2세의 공작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 년 후에 티무르군과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정면충돌하게 된다.

티무르군은 이후 시리아의 알레포로 향하여 그 군을 크게 무찌르고 알레포를 함락하였다. 티무르군은 4일동안 알레포를 불태우고 약탈하였고 2만의 주민을 학살하고 그 머리를 모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았다. 알레포를 함락한 티무르는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포위하였다. 티무르군은 공성무기를 총동원하고 성벽 밑에 갱도를 뚫어 결국은 다마스쿠스의 성벽을 붕괴시키고 다마스쿠스에 난입하였다. 티무르군은 수일 동안 멈추지 않고 다마스쿠스를 약탈하였고 다마스쿠스의 거리에는 수만 명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티무르군이 값나갈만한 모든 것을 빼앗은 후 다마스쿠스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다마스쿠스를 불태운 티무르군은 이집트를 치러 남쪽으로 움직였으나 팔레스타인 지방 근처에서 메뚜기떼의 습격이 크게 일어나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행군을 멈추었다.

마누엘 2세 황제의 초상

북쪽으로 간 티무르는 이전에 그의 두 아들이 바그다드로 이끌고 간 2만명의 부대가 아직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체 없이 바그다드로 진격을 명한 티무르는 바그다드에 도착한 후 총공격을 감행한다. 1258년 훌레구의 몽골군단에 의하여 불태워진 바그다드는 다시 한 번 재앙을 맞았다. 바그다드는 함락이 되고 티무르군은 2만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2만명의 잘린 머리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린 후 불태워졌고 불이 꺼진 후 사막 한가운데에는 두개골로 이루어진 끔찍한 탑이 남았다. 마누엘 2세의 사신은 동로마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인 오스만 술탄 바야제트를 무찔러 주면 동로마 황제가 티무르의 신하가 될 것이라며 오스만에 대한 동맹을 제안하였다. 사실 이때 마누엘 2세는 바야제트와 항복을 전제로 한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티무르의 등장은 동로마의 명운(命運)을 연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였다. 티무르와 바야제트는 이미 오랫동안 모욕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다. 마누엘 2세의 공작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동부를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소식을 접한 바야제트 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터키로 군을 이끌고 달려갔다. 수년간 풀리지 않던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는 티무르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풀린 것이다.

바야제트는 니코폴리스에서의 전공으로 얻은 ‘천둥’이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약 85,000의 병력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지금의 터키 중부로 진격하였다. 티무르의 군은 비록 오랜 원정으로 지치기는 하였지만 바야제트보다 많은 14만이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수적 우위만을 믿지 않고 수개월 동안 바야제트의 투르크군에 종군하고 있던 타타르족들의 수장들을 상대로 공작을 폈다. 티무르는 자신의 군대 대부분이 타타르인인 것을 수장들에게 주지시키면서 동족간의 상잔(相殘)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동포애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만약 티무르군과 오스만투르크군의 싸움에서 티무르가 이기게 해준다면 엄청난 전리품을 주기로 약속하고 타타르의 협조약속을 얻어냈다. 공교롭게도 티무르의 군에도 투르크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타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동족상잔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오스만군과 티무르군은 1402년 7월에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 앙카라 근처에서 멈추고 서로를 탐색하면서 주변을 배회하였다. 투르크군의 우익은 특이하게도 세르비아 출신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투르크가 세르비아를 점령하면서 제후가 된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끌고 나온 병력이었다. 바야제트는 라자레비츠의 누이인 올리베라 데스피나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대신 세르비아의 자치를 보장해주었다. 앙카라에 등장한 세르비아 기사들의 번쩍이는 갑옷은 햇볕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다.

이윽고 세르비아 기사들이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티무르군은 중무장 기사들의 돌격에 기마궁사들의 화살연사로 맞섰다. 몇 명이 쓰러지기는 하였지만 중무장한 기사들은 그대로 기마궁사들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고 경장(輕裝)의 기마궁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감당할 수 없어 뒤로 물러섰다. 이때 티무르군의 우익에 포진한 기마병이 투르크 좌익을 향하여 맹렬히 돌격하여 투르크 좌익을 거세게 압박하였다. 티무르의 우익은 곧 우위를 점하였지만 세르비아 기사들의 공격도 만만치 않게 거셌고 싸움은 대등하였다.

바로 이때 투르크군 좌익에 있던 타타르군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러 투르크 본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야제트의 아들인 술레이만 첼레비 왕자가 지휘하던 투르크군 좌익은 타타르인들의 배신이 결정타가 되어 힘없이 무너졌고 무질서하게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좌익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세르비아 기사들은 용감해야하는 술탄의 왕자가 도망가는 꼴을 보자 전장을 이탈하였다. 타타르의 배신과 술레이만의 도주, 그리고 세르비아군의 이탈 이후 바야제트에게 남은 것은 예비대인 시파히 기병과 정예보병 예니체리 밖에 없었다. 기독교 가정의 맏이들로 태어났지만 철저한 이슬람 전사로서 훈련을 받은 예니체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좌우익이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본군만으로는 티무르의 대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바야제트에게 남아있는 병력이 모두 죽거나 도주하고 바야제트는 300명의 패잔병과 함께 높은 언덕위로 올라가 싸웠다. 그러나 결국 고지의 진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바야제트는 티무르의 대군 속을 뚫고 나가려다가 말에서 떨어져 티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바야제트의 투르크군을 꺾은 티무르군은 지금의 터키 전역을 휩쓴 다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초기 수도였던 브루사로 달려가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물론 바야제트의 다른 왕자들이 이미 국고의 보물을 빼돌려 마르마라해(海)를 건너 유럽으로 탈출한 후였지만 브루사에 남은 귀중품은 아직도 상당했다. 티무르군은 부르사에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철저히 약탈하였다.

티무르에게 잡힌 바야제트는 그래도 일국의 군주로서 후한 대접을 받기는 하였으나 감금된 체로 하루 종일 지내야 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전장에 같이 나갔던 데스피나는 티무르의 장막에서 나체로 시중을 드는 등의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바야제트는 결국 화병이 나서 이듬해(1403년)에 병사(病死)한다. 마누엘 2세는 때가 되면 항복하기로 바야제트에게 한 약속을 파기하고 오스만투르크의 왕자들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영토를 북쪽으로 약간 넓히고 기존에 있던 요새들을 강화시켰다. 유럽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티무르와의 한 판 싸움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동로마보다 빨리 멸망의 길을 걷는 듯싶었다.

바야제트를 사로잡은 티무르

오스만의 부활

앙카라에서의 패배 후 오스만 제국에서는 왕위를 둘러 싼 대혼란이 일어났고 만약 유럽이 이때 동맹군을 형성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였으면 오스만 투르크는 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앙카라에서 바야제트를 사로잡은 티무르는 바야제트의 왕자 중 한 명인 메흐메트 첼레비를 오스만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오스만의 술탄이 티무르의 제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자들은 메흐메트를 꼭두각시로 여기면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메흐메트와 다른 왕자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유럽과 동로마의 관점에서 이는 천금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앞서 말한 유럽의 분열상과 함께 100년 전쟁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동로마 자체의 약세로 인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분열이 제공한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티무르는 명나라 정벌을 위하여 사마르칸드로 회군하였고 메흐메트는 다른 왕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무너져가던 오스만 투르크를 다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메흐메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중건(重建)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메흐메트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무라드 2세가 즉위하자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술탄이 된 후에 여러 도시들을 동로마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전에 포로로 잡아두고 있었던 투르크 왕자 무스타파 첼레비를 풀어준다. 풀려난 무스타파는 재빨리 병사들을 모아 무라드 2세가 보낸 베야지드 파샤의 군을 무찌르고 아드리아노플에서 술탄으로 즉위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한 번 혼란으로 빠져드는 듯싶었으나 무스타파의 병사들은 그의 잔인함과 불 같은 성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군대 대부분이 떠나고 무스타파는 게리볼루(갈리폴리)에서 무라드 2세에게 패하여 죽는다. 무라드 2세는 무스타파의 반란을 정리한 후 142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티무르의 등장으로 잠시 숨통을 텄던 동로마는 20년 만에 다시 경각에 처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한 반도를 둘러 싼 넓은 포위망을 구축한 후 무라드 2세는 유럽으로의 진격을 재개하여 1430년에 동로마가 회복하였던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를 다시 차지하고 1439년에는 세르비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1444년에는 헝가리 왕가의 섭정인 야노스 훈야디의 군을 바르나에서 격파하면서 헝가리는 더 이상 오스만의 발칸반도 점령에 개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칸데르베크가 이끄는 알바니아 점령에는 실패하였고 무라드 2세가 1451년에 아드리아노플에서 사망하면서 아들인 메흐메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동로마의 멸망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군이 1453년에 포위하기 전까지 무려 13차례의 큰 공성전을 치렀다. 그러나 1204년에 4차 십자군에 의하여 단 한 차례 함락되었을 뿐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흑해가 지중해로 빠져 나오는 보스포루스 해협 왼편의 조그마한 반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육지로는 3중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도 해안을 따라 지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육지부분의 외벽에는 무수한 고탑(高塔)과 함께 10개의 거대한 문이 있었다.

이때의 동로마 ‘제국’은 참담할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밖 수 km정도, 에게해의 몇몇 군도, 그리고 그리스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몇몇 요새밖에 없었다. 제국의 영토였던 곳은 모두 투르크가 차지한 뒤였고 이제 새로이 술탄으로 등극한 메흐메트 2세는 수 없는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하였다. 여러 방향에서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제노바와의 협약을 맺고 흑해의 무역기지들로부터 지속적인 해상보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아시아쪽 대안(對岸)에 요새를 지어 콘스탄티노플의 보급로를 끊으려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을 1,000년이 넘게 지켜준 것은 4세기중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어놓은 두터운 성벽이었는데 메흐메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인 우르바노스를 고용하여 ‘바실리카’라는 거대한 공성포를 제조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공략할 무기까지 확보하였다. 비록 250kg의 철탄(鐵彈)과 화약을 장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고작 7번밖에 발사할 수는 없었지만 이 무지막지한 철탄은 석벽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은 종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서게 되었다.

다급해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대가로 교황은 동로마가 바티칸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비록 내부에서의 반대가 심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자 이에 고무된 니콜라오 5세는 서유럽 국가들에게 동로마를 도울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간섭을 매우 귀찮게 여기던 왕과 영주들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동로마를 1000년간이나 지탱해온 정교회를 가톨릭에 복속시키면서까지 서유럽의 도움을 바랐지만 받은 것은 고작 궁수 200명이었다. 동로마에게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것은 제노바 출신의 용병대장인 죠반니 지우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였다. 지우스티니아니는 공성전에 맞서는 방어전의 전문가로 유럽에서 이름이 드높았고 1453년 1월에 용병 700명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에게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에 대한 전권을 주었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 11세는 1204년에 4차 십자군이 황금곶 방향에서 해안성벽을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난입하였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황금곶 입구를 거대한 사슬로 막아 투르크 함선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육지의 외벽 중 가장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취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블라케르나에(Blachernae)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수하였다.

15세기 터키에서 만들어진 대포.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사용된 ‘바실리카’와 비슷한 유형이다.

전투는 메흐메트 2세가 2만의 비정규 병력(바시-바주크)와 7만의 정규군을 거느리고 1453년 4월 6일에 콘스탄티노플 앞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않고, 가지고 온 대포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포격하여 부수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 예비 포격은 열흘을 넘겨 계속되었고 마침내 4월 18일에 성벽이 충분히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메흐메트 2세는 총공격을 명하였다. 공성포의 포격으로 인하여 성벽에 약간의 틈이 생겼지만 많은 수의 병사들이 일시에 진입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투르크의 첫 공격은 200명의 사상자만 내고 수월히 격퇴되었다. 4월 20일에는 제노바에서 온 수송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순시하던 투르크 함선들의 수비를 뚫고 황금곶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메흐메트는 황금곶을 가로막는 거대한 사슬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았고 결국 해협에서 시작하여 약 2km에 이르는 목재도로를 만든 후 그 길 위로 함선들을 올려 황금곶으로 날랐다. 황금곶에 들어온 투르크 함선들은 직접적인 위협은 안 되었지만 이로서 콘스탄티노플의 보급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초반 공격에 실패한 메흐메트 2세는 다시 포격을 명하였고 5월 6일에는 성(聖) 로마누스의 문(門) 근방의 성벽이 포격에 무너졌다. 이 지점은 리쿠스 강(江)이 콘스탄티노플안으로 흘러드는 지점이어서 블라케르나에와 함께 성벽의 취약지점이었다. 이 부분이 무너지자 지우스티니아니는 성벽을 다시 짓는 것을 포기하고 무너진 지점 약간 뒤에 새 벽을 쌓았다. 다음 날 2만 5000의 투르크군에 의한 일제 공격이 이어졌으나 불과 3시간의 전투 후 무수한 시신을 남겨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크군의 포격은 다시 블라케르나에에 집중되었고 5월 12일에 이 구역의 성벽이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그의 근위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에 나섰고 투르크의 공격을 다시 한 번 격퇴하였다.

성벽에 대한 직접 공격에 실패한 메흐메트는 그의 군사들에게 성벽 밑을 파서 무너뜨릴 것을 명령하였다. 땅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공성전에서 상당히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공성전에서 자주 쓰인다는 것은 수비측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마침 콘스탄티노플에는 방어전의 대가인 지우스티니아니뿐만 아니라 탁월한 공성기술자인 요한 그랜트(Johannes Grant)가 있었다. 원래는 독일인이라고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여 스코틀랜드 출신 존 그랜트(John Grant)임이 유력시되고 있는 이 천재 기술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응용하여 투르크군이 굴을 파고 있는 위치를 밝혀냈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투르크의 땅굴공격을 좌절시켰다. 맞은편에서 땅굴을 판 다음 병사들을 투입하여 투르크 인부들을 죽이거나 위에서 구멍을 내서 액체 화약인 그리스의 불(Greek Fire)를 붓고 불을 붙이고, 또는 투르크군이 굴을 파고 있는 지점 바로 밑으로 굴을 파서 투르크군의 굴을 붕괴시켰다. 심지어 투르크군이 파고 있는 땅굴에 물길을 끌어와서 투르크 인부들을 익사시키는가 하면 땅굴에 불붙은 화약덩이를 던져 인부들을 폭사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무려 14개의 갱도를 팠지만 그랜트의 활약 때문에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투르크군은 방법을 바꾸어 거대한 누차(樓車)를 만들어 성벽을 위에서부터 공격하려 하였다.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 외벽의 최북단인 카리시우스 문을 공격지점으로 삼았다. 카리시우스문 역시 투르크군의 포격으로 약화된 상태였고 투르크군은 누차를 밀어 외벽 밖의 해자(垓字)에 접근한 다음 누차에 탄 병사들이 수비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게 하였다. 이로서 해자를 건너는 투르크 보병들은 성벽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튼튼하게 지어진 누차는 화살과 동로마군이 보유한 소형포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만약 이번 공격을 막지 못하면 다음 날에는 분명히 총공격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벽 밖으로 나가 누차를 공격할 결사대를 모았고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모였다. 동로마군은 어둠이 깔리기를 기대려 누차 습격에 나섰다. 성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수비군이 공격해 나오리라 예상치 못하고 있던 투르크군은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였고 결사대는 투르크 보초병들이 지키고 있던 지점을 돌파하여 누차를 향하여 불 붙인 그리스의 불 항아리를 던졌다. 그리스의 불로 공격당한 투르크의 누차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탔고 투르크군이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사이 수비군은 밤 세워 무너진 성벽과 탑을 수리하였다. 다음 날 아침, 카리시우스 문 근처의 성벽과 탑은 새로 만들어졌고 투르크군의 누차는 숯덩이가 되어 성벽 앞에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투르크군을 향하여 돌격하는 콘스탄티누스 11세 (20세기 초반, 그리스)

식량이 부족하고 거의 두 달이 되도록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동로마 수비군이 지쳤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공격하는 투르크군도 계속되는 실패로 인하여 지쳐가고 있었다. 마침내 메흐메트 2세는 참모들을 모아 공격을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일부는 손해가 자꾸만 쌓여가니 그만두자고 하였고 일부는 포기하면 술탄의 위신이 큰 타격을 입으니 계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메흐메트는 심사숙고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격해보고 만약 실패하면 물러나기로 하였다.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공격이 있었고 그나마 가장 성공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크 진영에 숨어있던 동로마 첩자가 이를 황제에게 보고하였지만 동로마로서는 대비를 단단히 할 수 있을 뿐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투르크의 ‘마지막’ 공격은 5월 29일 새벽 2시에 이어졌다. 다시 불량배 집단인 바시-바주크에 의한 육탄공격이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동로마 수비병들은 화살과 화약무기를 총동원하여 겨우 1차 돌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돌격이 좌절되자마자 정규병들에 의한 2차의 돌격이 이어졌고 수비병들은 쉴 틈 없이 다시 싸워야 했다. 2차의 돌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잠도 자지 못한 수비병들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는 메흐메트의 작전이었다. 2차 돌격이 실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정예 보병인 에니체리를 투입하였다. 수비병들은 몽롱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싸웠다. 놀랍게도 예니체리에 의한 3차돌격도 저지되었다.

투르크의 마지막 공격도 무위로 돌아가는 하였으나 블라케르나에 근처의 돌문(突門: sally gate, 수비병들이 성밖 기습을 위하여 출입하는 문)이 열린 채로 있었고 이를 본 일단의 투르크 병사들이 진입하여 근처의 탑을 점거하고 투르크군의 군기를 세웠다. 콘스탄티노플의 탑에 투르크의 군기가 휘날리자 성벽이 뚫렸다는 소문이 수비 병력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수비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지우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중상을 입고 성 밖으로 옮겨졌다. 배로 옮겨진 지우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고 만다. 퍼지고 있던 소문과 지우스티니아니의 부상은 치명타였다. 사기가 떨어진 수비병들은 잘 싸우지 못하였고 투르크군의 4차 돌격이 이어졌다. 투르크군은 마침내 성벽을 돌파하여 성안으로 난입하였다. 제국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안 콘스탄티누스는 치욕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의 근위대와 함께 성안으로 난입하고 있던 투르크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동로마는 이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흔히 서양역사에서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가 시작되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중세 이전부터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비록 유산이긴 하지만 고전시대의 제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국가가 마침내 그 운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을 돕기를 거부하였지만 투르크 세력을 물리칠 것으로 생각한 서방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동로마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데 성공한 투르크의 군사력이 이제는 자신들에게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1529년 투르크의 빈 공격이 좌절될 때까지는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15세기의 유럽은 8세기 아랍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격 때와는 달랐다. 비록 정치적으로 분열되어있기는 하지만 유럽이 이슬람과 군사적으로 대적할만한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1571년 신성동맹(Holy League)의 연합해군이 레판토에서 투르크 해군을 크게 이기면서 증명이 되었다 1683년에 투르크는 빈을 다시 한 번 포위하였지만 폴란드와 독일이 힘을 합쳐 투르크군을 여지없이 무찔렀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동로마의 학문과 기술이 유럽으로 전해져 르네상스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서 2000년 이어져온 로마의 역사는 끝이 나고 유럽은 서서히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Royal Nav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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