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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中, 파룬궁 탄압 진짜 이유

arang 2519 2013. 12. 30. 18:20

왜 중국에서는 그토록 파룬궁을 박해하는가?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사회적 효과

 

중국에서 파룬궁은 애초에 대대적인 선전 없이 해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자발적으로 퍼진 기공수련이다. 수련원리가 명확하고, 동작은 간단하며 배우기 쉬워,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이 무료이며  심신개선효과가 탁월하여 1992년 리홍즈 선생에 의해 처음 대중에 소개된 이후 2002년 10년간 세계 50여개 국가에 전해져 1억명 이상이 배우면서 각 정부와 단체로 부터 700여개의 표창과 지지를 받았다.

 

이는 파룬궁이 진선인(眞善忍)을 통해 사회에 모범이 되고, 가정에 귀감이 되는 '선타후아'(先他後我:타인의 입장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라)의 실천을 상당히 중요한 수련 항목으로 여기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효과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파룬궁은 처음 소개되고 불과 1년뒤 중국 베이징 동방건강 박람회에서  최고상인 “변연(邊緣)과학진보상”, 그리고 “특별 금상”과 “대중에게 환영받는 기공사” 칭호을 수여 받았다. 당시 박람회에서 리훙즈 선생은 기공사 중에서 상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럼 중국은 왜 갑자기 파룬궁을 반대하게 되었는가?
이는 파룬궁 박해를 결정한 前 중국 주석 장쩌민의 성품과 경향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 학생민주화 운동인 천안문사태때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유독 장쩌민이 총서기로 있는 상하이시만 잠잠했다. 그는 시위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동조적인 논조를 펴던 상해의 세계경제도보 총편집을 즉각 해고하고 노동자 감찰대로 하여금 이 신문을 장악토록 하는 강경대응을 보임으로써 등소평의 눈에 띄었고, 이는 후에 후계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만약 파룬궁이 박해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중국 전역에 파륜궁이 더욱 확산되었을 것으로 전망하는데,
특히 창시자인 리홍즈 선생에 대한 선망과 칭송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자 장쩌민은 상당히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고 공산주의 이론 등 모든 분야를 통달한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탄압의 원인이 된 뛰어난 수련효과와 사회적 지지

 

1995년 리홍즈 선생의 저서 전법륜이 출판되고 이듬해 1월 베이징 10대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1997년 공안부는 비밀리에 전국 공안국에 "파룬궁이 사교라고 규정할 만한 증거를 수집하라"고 명령하는데 모든 공안국에서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어 조사는 중지된다.

 

이듬해 1998년 국가체육총국 의학전문팀에 의해 각지역에서 다발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대대적인 건강 표본조사가 진행되었다. 화북 북경 2회(1만5천), 화남 광동(1만2천5백명), 화중 무한(2천명), 동북 대련(6천명) 등 총 3만5천여명에 이르는 전면적인 표본조사였다. 그 중 여성이 72.9% 차지하고, 50세 이상이 62.1% 차지하며, 수련 전에 각종 질병에 걸렸던 사람이 31,030명으로 무려 90.3%를 차지했다.

 

그런데 광동, 북경, 대련지역은 97.9% 가 병이 치료되었거나 건강이 매우 호전된것으로 나타났고, 북경과 광동성 86.5%가 심성이 좋게 변하고 자아조절과 심리제고에 효과를 얻었으며, 무한지역 99.5%는 술,담배와 도박을 끊었다고 조사된다. 이러한 결과를 종합하여 연구팀장은 "파룬궁 공법의 효과가 우수하고 사회의 안정과 정신건강에도 효과가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며, 이는 아주 확실하다."고 발표한다.

 

1998년 5월 중국과학원의 한 대학생이 파룬궁 수련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베이징TV에 인터뷰하여 크게 확산되었는데, 결국 해당 대학생(순씨)이 사실은 파룬궁 수련생이 아님이 밝혀지게 되고, 오히려 베이징 TV는 "방송국 설립 이래 최대 실수"라며 정정보도를 하게 된다.

 

 

 

일련의 일들에 불안을 느낀 장쩌민은 다시 1998년 7월 21일 공안부에 "먼저 죄를 정하고, 나중에 조사한다"는 공정[1998] 제555호 <<법륜공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를 하라>>는 통지를 발표한다. 이때부터 주요 수련생의 전화와 행적에 대해 감청과 감시를 진행하며, 파룬궁 연공장을 금지시키고, 집을 수색하며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 전국 인민대표자대회의 퇴직한 일부 노간부들은 파룬궁에 대해 수개월간의 상세한 조사연구를 진행한 후에,  "백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내용을 중앙정치국에 보고한다. 이에 장쩌민은 정색하며 "그러므로 진압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을 한다.

 

 

1999년 탄압 직전, 중국에서 양쯔강이 범람할 때 군, 경찰이 동원되어 강물을 막고 있었다. 장쩌민이 시찰하러 왔다가 열심히 제방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고 감격하여 어떤 사람들이 저렇게 헌신적이냐고 물었다. 알아본 결과 그들이 바로 파룬궁 수련생들이라는 답변을 듣자 그는 그 즉시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1999년 자신의 아들 장몐헝과 심복 자칭린의 부정부패가 주룽지 총리에게 포착되어 정치적 위기에 처하고, 급격히 확산되는 사회적인 불안을 돌파할 희생양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즉시 425청원 을 정치적 사건으로 규정하며 파룬궁을 지목한다.

 

 

중앙정치국의 일곱 상무위원 중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상무위원들이 한결같이 파룬궁 탄압에 반대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명예적으로 납작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단절시키며, 육체적으로는 소멸하라"는 수련생들의 생명박탈을 포함하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유사이래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게 하였다.

 

그는 이를 중국 내부를 평정하는 ‘칼’과 공산당 원로들에 대한 반격의 ‘창’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박해는 그의 묵인과 부추김하에 군부와 측근들의 막대한 이익창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출처 : 함께 배우는 파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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