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조 선 -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 위 만 조 선 -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고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漢)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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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자 조 선 -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의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
(…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순번 |
명 칭 |
재위기간 |
비 고 |
순번 |
명 칭 |
재 위 기 간 |
비 고 | |||
1 |
1,안파견安巴堅桓因 |
3,301년 (위 기간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함.) |
桓 國 |
38 |
屹 達 |
13 흘 달, 61년 |
壇 君 47대 단군왕2096년 동안 통치.
B,C 239년고열가단군은 자신의 무능 함을 탄식 하고 해모수에게 왕위를 물려줌.해모수는조선을夫餘라 건국함 | |||
2 |
2,혁 서 赫胥桓因 |
桓 因 |
39 |
古 弗 |
14 고 불, 60년 | |||||
3 |
3,고시리古是利桓因 |
40 |
代 音 |
15 대 음, 51년 | ||||||
4 |
4,주우양朱于襄桓因 |
41 |
尉 那 |
16 위 나, 58년 | ||||||
5 |
5,석제임釋帝壬桓因 |
42 |
余 乙 |
17 여 을, 68년 | ||||||
6 |
6,구을리邱乙利桓因 |
43 |
冬 奄 |
18 동 엄, 49년 | ||||||
7 |
7,지위리智爲利桓因 |
44 |
緱 牟 蘇 |
19 구모소, 55년 | ||||||
8 |
居發桓, 桓雄 |
1, 거발한, 94년 |
桓 雄 bc3898년신시배달 조선건국. BC2333년까지 1565년 동안통치. 14대 환웅인 자오지천황은 우리가 알고있는치우천황이며, 중국의 시조인 헌원 황제를 꺽고 동양의 최강자로 군림한다 |
45 |
固 忽 |
20 고 홀, 43년 | ||||
9 |
居 佛 理 |
2, 거불리, 86년 |
46 |
蘇 台 |
21 소 태, 52년 | |||||
10 |
右 耶 古 |
3, 우야고, 99년 |
47 |
索 弗 婁 |
22 색불루, 48년 | |||||
11 |
慕 士 羅 |
4, 모사라, 107년 |
48 |
阿 忽 |
23 아 홀, 76년 | |||||
12 |
太 虞 儀 |
5, 태우의, 93년 |
49 |
延 那 |
24 연 나, 11년 | |||||
13 |
多 儀 發 |
6, 다의발, 98년 |
50 |
率 那 |
25 솔 나, 88년 | |||||
14 |
居 連 |
7, 거 련, 81년 |
51 |
鄒 魯 |
26 추 로, 65년 | |||||
15 |
安 夫 連 |
8, 안부련, 73년 |
52 |
豆 密 |
27 두 밀, 26년 | |||||
16 |
養 雲 |
9, 양 운, 96년 |
53 |
奚 牟 |
28 해 모, 28년 | |||||
17 |
葛古,瀆盧韓 |
10, 갈고,독로한,100년 |
54 |
摩 休 |
29 마 휴, 34년 | |||||
18 |
居 耶 發 |
11, 거야발, 92년 |
55 |
奈 休 |
30 내 휴, 35년 | |||||
19 |
州 武 愼 |
12, 주무신,105년 |
56 |
登 屼 |
31 등 올, 25년 | |||||
20 |
斯 瓦 羅 |
13, 사와라, 67년 |
57 |
鄒 密 |
32 추 밀, 30년 | |||||
21 |
慈烏支,蚩尤 |
14, 자오지, 치우천황, 109년 |
58 |
甘 勿 |
33 감 물, 24년 | |||||
22 |
蚩 額 特 |
15, 치액특, 89년 |
59 |
奧 婁 門 |
34 오루문,23년 | |||||
23 |
祝 多 利 |
16, 축다리, 56년 |
60 |
沙 伐 |
35 사 벌, 68년 | |||||
24 |
赫 多 世 |
17, 혁다세, 72년 |
61 |
買 勒 |
36 매 륵, 58년 | |||||
25 |
居弗檀,檀雄 |
18, 거불단,단웅,48년 |
62 |
麻 勿 |
37 마 물, 56년 | |||||
26 |
檀君 王儉 |
1 왕 검, 93년 |
壇 君 B,C 2333년 신시 배달조선 9국을 모아 단군조선으로 건국. 단군우서한 때인 B,c1987 세발달린 거대한 까마귀 (삼족오)출현. |
63 |
多 勿 |
38 다 물, 45년 | ||||
27 |
扶 婁 |
2 부 루, 58년 |
64 |
豆 忽 |
39 두 홀, 36년 | |||||
28 |
嘉 勒 |
3 가 륵, 45년 |
65 |
達 音 |
40 달 음, 18년 | |||||
29 |
烏 斯 丘 |
4 오사구, 38년 |
66 |
音 次 |
41 음 차, 20년 | |||||
30 |
丘 乙 |
5 구 을, 16년 |
67 |
乙 于 支 |
42 을우지, 10년 | |||||
31 |
達 門 |
6 달 문, 36년 |
68 |
勿 理 |
43 물 리, 36년 | |||||
32 |
翰 栗 |
7 한 율, 54년 |
69 |
丘 勿 |
44 구 물, 29년 | |||||
33 |
于 西 翰 |
8 우서한, 8년 |
70 |
余 婁 |
45 여 루, 55년 | |||||
34 |
阿 述 |
9 아 술, 35년 |
71 |
普 乙 |
46 보 을, 46년 | |||||
35 |
魯 乙 |
10 노 을, 59년 |
72 |
古 列 加 |
47 고열가,58년 | |||||
36 |
道 奚 |
11 도 해, 57년 |
73 |
解 慕 漱 |
48해모수,45년 |
天王郞 | ||||
37 |
阿 漢 |
12 아 한, 52년 |
74 |
高 朱 蒙 |
49고주몽,B.C58 |
皇 帝 |
(1) 고조선 왕 계보
1 안파견 한님(安巴堅 桓因)
2 혁 서(赫胥) |
(2) 배달국 환웅계표 (BC 3898 ∼ BC 2333)
1 거발환(居發桓)
2 거불리(居佛理)
3 우야고(右耶古)
4 모사라(慕士羅)
5 태우의(太虞儀)
6 다의발(多儀發)
7 거 련(居連)
8 안부련(安夫連)
9 양 운(養雲)
10 갈 고(葛古)
11 거야발(居耶發)
12 주무신(州武愼)
13 사와라(斯瓦羅)
14 자오지(慈烏支) - 일명 치우천황
15 치액특(蚩額特)
16 축다리(祝多利)
17 혁다세(赫多世)
18 거불단(居弗檀)
(3) 단군조선 단군계표(BC 2333 ∼ BC 238)
1 왕검(王儉) - 단군이시다.
2 부루(扶婁)
3 가륵(嘉勒)
4 오사구(烏斯丘)
5 구을(丘乙)
6 달문(達門)
7 한율(翰栗)
8 우서한(于西翰)
9 아술(阿述)
10 노을(魯乙)
11 도해(道奚)
12 아한(阿漢)
13 흘달(屹達)
14 고불(古弗)
15 대음(代音)
16 위나(尉那)
17 여을(余乙)
18 동엄(冬奄)
19 구모소(구牟蘇)
20 고홀(固忽)
21 소태(蘇台)
22 색불루(索弗婁)
23 아홀(阿忽)
24 연나(延那)
25 솔나(率那)
26 추로(鄒魯)
27 두밀(豆密)
28 해모(奚牟)
29 마휴(摩休)
30 내휴(奈休)
31 등올(登올)
32 추밀(鄒密)
33 감물(甘勿)
34 오루문(奧婁門)
35 사벌(沙伐)
36 매륵(買勒)
37 마물(麻勿)
38 다물(多勿)
39 두홀(豆忽)
40 달음(達音)
41 음차(音次)
42 을우지(乙于支)
43 물리(勿理)
44 구물(丘勿)
45 여루(余婁)
46 보을(普乙)
47 고열가(高列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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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高句麗, B.C 37 ~A.D 668, 705년간, 총28대)
代 |
왕명 |
재위 |
약사 |
1 |
동명성왕 B.C 58~B.C 19 |
B.C 37 |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
2 |
유리왕(榴璃, ?~18) |
B.C 19 |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
3 |
대무신왕(大武神, 4~44) |
18~44 |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
4 |
민중왕(閔中, ?~48) |
44~48 |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
5 |
모본왕(慕本, ?~53) |
48~53 |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
6 |
국조왕(國祖, 47~165) |
53~146 |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
7 |
차대왕(次大, 71~165) |
146~165 |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
8 |
신대왕(新大, 89~179) |
165~179 |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
9 |
고국천왕(故國川, ?~197) |
179~197 |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
10 |
산상왕(山上, ?) |
197~229 |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
11 |
동천왕(東川, ?~248) |
227~247 |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동양왕(東襄) |
12 |
중천왕(中川, ?~270) |
247~270 |
동천왕의 아들 |
13 |
서천왕(西川, ?~292) |
270~292 |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
14 |
봉상왕(烽上, ?~300) |
292~300 |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 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
15 |
미천왕(美川, ?~331) |
300~330 |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
16 |
고국원왕(故國原, ?~371) |
331~371 |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
17 |
소수림왕(小獸林, ?) |
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
18 |
고국양왕(故國壤, ?~391) |
384~391 |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
19 |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
391~413 |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영락대왕(永樂) |
20 |
장수왕(長壽, 394~490) |
413~490 |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
21 |
문자명왕(文咨明, ?~519) |
491~519 |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
22 |
안장왕(安藏, ?~531) |
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
23 |
안원왕(安原, ?) |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
24 |
양원왕(陽原, ?~559) |
545~559 |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
25 |
평원왕(平原, ?~590) |
559~590 |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
26 |
영양왕(瓔陽, ?~618) |
590~618 |
휘는 원(元). 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섬멸 하였음.평양왕(平陽) |
27 |
영류왕(榮留, ?~641) |
618~641 |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
28 |
보장왕(寶藏, ?~681) |
642~668 |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백제시대(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온조왕(溫祚, ?~28) |
B.C 18~A.D 29 |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
2 |
다루왕(多婁, ?~77) |
28~77 |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 |
기루왕(己婁, ?~128) |
77~128 |
다루왕의 맏아들. |
4 |
개루왕(蓋婁, ?~166) |
128~166 |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
5 |
초고왕(肖古, ?~214) |
166~214 |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 |
구수왕(仇首, ?~234) |
214~234 |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 수왕. |
7 |
사반왕(沙泮) |
234 |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
8 |
고이왕(古爾, ?~286) |
234~286 |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
9 |
책계왕(責稽, ?~298) |
286~298 |
고이왕 아들. |
10 |
분서왕(汾西, ?) |
298~304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 |
비류왕(比流, ?~344) |
304~344 |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
12 |
설왕( ,?~346) |
344~346 |
분서왕의 맏아들 |
13 |
근초고왕(近肖古, ?~375) |
346~375 |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
14 |
근구수왕(近仇首, ?~384) |
375~384 |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
15 |
침류왕(枕流, ?~385) |
384~385 |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
16 |
진사왕(辰斯, ?~392) |
385~392 |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
17 |
아신왕(阿莘, ?~405) |
392~405 |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
18 |
전지왕(琠支, ?~420) |
405~420 |
아신왕의 아들. |
19 |
구이신왕(久爾辛, ?~427) |
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
20 |
비유왕(毘有, ?) |
427~454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
21 |
개로왕(蓋鹵, ?~475) |
455~475 |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
22 |
문주왕(文周, ?~477) |
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
23 |
삼근왕(三斤, ?) |
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
24 |
동성왕(東城, ?~501) |
479~501 |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25 |
무령왕(武寧, ?~523) |
501~523 |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
26 |
성왕(聖, ?~554) |
523~554 |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
27 |
위덕왕(威德, ?~598) |
554~598 |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
28 |
혜왕(惠, ?~599) |
598~599 |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
29 |
법왕(法, ?) |
599~600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 을 착수함. |
30 |
무왕(武, ?~641) |
600~641 |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 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
31 |
의자왕(義慈, ?~660) |
641~660 |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신라시대(新羅, B.C.57~935, 992년간, 총 56대)
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代 |
왕명 |
재위기간 |
성 |
약사 |
1 |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
BC57~AD4 |
朴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
4~24 |
朴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
24~57 |
朴 |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
4 |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
57~80 |
昔 |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
5 |
파사이사금 (婆娑, ?~112) |
80~112 |
朴 |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이사금(祗摩, ?) |
112~134 |
朴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
7 |
일성이사금(逸聖, ?) |
134~154 |
朴 |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
154~184 |
朴 |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 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
9 |
벌휴이사금(伐休, ?~196) |
184~196 |
昔 |
탈해왕의 손자 |
10 |
나해이사금(奈解, ?~230) |
196~230 |
昔 |
벌휴왕의 손자. |
11 |
조분이사금(助賁, ?~247) |
230~247 |
昔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
12 |
첨해이사금(沾解, ?~261) |
247~261 |
昔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이사금(味鄒, ?~284) |
262~284 |
金 |
김씨 왕가의 시조 |
14 |
유례이사금(儒禮, ?~298) |
284~298 |
昔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
298~310 |
昔 |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16 |
흘해이사금(訖解, ?~356) |
310~356 |
昔 |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
356~402 |
金 |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
18 |
실성마립간(實聖, ?~417) |
402~417 |
金 |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
19 |
눌지마립간(訥祗, ?~458) |
417~458 |
金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마립간(慈悲, ?~479) |
458~479 |
金 |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21 |
소지마립간(炤知, ?) |
479~500 |
金 |
|
22 |
지증왕(智證, 437~514) |
500~514 |
金 |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23 |
법흥왕(法興, ?) |
514~540 |
金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24 |
진흥왕(眞興, 534~576) |
540~576 |
金 |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
25 |
진지왕(眞智, ?) |
576~579 |
金 |
휘는 사륜(舍輪) |
26 |
진평왕(眞平, ?~632) |
579~632 |
金 |
휘는 백정(白淨) |
27 |
선덕여왕(善德, ?) |
632~647 |
金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28 |
진덕여왕(眞德, ?~654) |
647~654 |
金 |
휘는 승만(勝蔓) |
29 |
무열왕(武烈, 604~661) |
654~661 |
金 |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
30 |
문무왕(文武, ?~681) |
661~681 |
金 |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
31 |
신문왕(神文, ?~692) |
681~691 |
金 |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32 |
효소왕(孝昭, 643~702) |
692~702 |
金 |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聖德, ?~737) |
702~737 |
金 |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34 |
효성왕(孝成, ?~742) |
737~742 |
金 |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景德, ?~765) |
742~765 |
金 |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36 |
혜공왕(惠恭, 765~780) |
765~780 |
金 |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宣德, ?~785) |
780~785 |
金 |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
38 |
원성왕(元聖, ?~798) |
785~798 |
金 |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39 |
소성왕(昭聖, ?~800) |
798~800 |
金 |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哀莊, 788~809) |
800~809 |
金 |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41 |
헌덕왕(憲德, ?~826) |
809~826 |
金 |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42 |
흥덕왕(興德, ?~836) |
826~836 |
金 |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 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43 |
희강왕(僖康, ?~838) |
836~838 |
金 |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閔哀, ?~839) |
838~839 |
金 |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45 |
신무왕(神武, ?~839) |
839 |
金 |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
46 |
문성왕(文聖, ?) |
839~857 |
金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憲安, ?~861) |
857~861 |
金 |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48 |
경문왕(景文, ?~875) |
861~875 |
金 |
휘는 응렴(膺廉) |
49 |
헌강왕(憲康, ?~886) |
875~886 |
金 |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
50 |
정강왕(定康, ?~887) |
886~887 |
金 |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眞聖, ?~897) |
887~897 |
金 |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
52 |
효공왕(孝恭, ?~912) |
897~912 |
金 |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여왕(神德, ?~917) |
913~917 |
朴 |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54 |
경명왕(景明, ?~924) |
917~924 |
朴 |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景哀, ?~927) |
924~927 |
朴 |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
56 |
경순왕(敬順, ?~978) |
927~935 |
金 |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가락시대(駕洛, 42~532 , 490년간, 총10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수로왕(首露, 42~199) |
42~199 |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함 |
2 |
거등왕(居登, ?~253) |
199~259 |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
3 |
마품왕(麻品, ?~291) |
259~291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居叱彌, ?~346) |
291~346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伊尸品, ?~407) |
346~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坐知, ?~421) |
407~421 |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
7 |
취희왕(吹希, ?~451) |
421~451 |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
8 |
질지왕(?~492) |
451~492 |
취희왕의 아들 |
9 |
겸지왕(鉗知, ?~521) |
492~521 |
고이왕 아들. |
10 |
구형왕(仇衡, ?) |
521~532 |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발해(渤海, 699~926 , 227년간, 총15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고왕 |
699-719 |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2 |
무왕 |
719~737 |
휘는 대무예(大武藝). 대조영의 아들. 연호를 인안이라 했다. 무력을 양성, 흑수말갈, 당나라 등주를 공격했다. |
3 |
문왕 |
737~793 |
휘는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 내치에 치중하여 관직제도 제정,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 설립 등 정치, 문화발전에 힘썼다. |
4 |
폐왕 |
793~794 |
휘는 대원의(大元義). 문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대굉림(大宏臨)도 일찍 사망하였다. 굉림의 아들인 대화여의 나이가 어려 세력이 강했던 그가 왕위에 올랐지만, 정통성 문제로 1년도 못되어 살해되었다. |
5 |
성왕 |
794~795 |
휘는 대화여(大華與). 대굉림(大宏臨)의 아들. 폐왕이 포악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폐하고, 성왕을 옹립하였다.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수도를 이전 도읍지였던 상경(上京)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
6 |
강왕 |
795~809 |
휘는 대숭린(大崇隣). 성왕(成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일본 등과 문물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결과 외교사절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연호를 정력(正曆). |
7 |
정왕 |
809~812 |
휘는 대원유(大元瑜). 강왕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적으로서 특기할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연호를 영덕(永德). |
8 |
희왕 |
812~817 |
휘는 대언의(大言義). 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으로 책봉받았다. 814년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제도를 받아들였으며,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였다. 연호를 주작(朱雀). |
9 |
간왕 |
817~818 |
휘는 대명충(大明忠).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행적은 별로 없다. 연호는 태시(太始). |
10 |
선왕 |
818~830 |
휘는 대인수(大仁秀).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渤)의 4세손이다. 고구려와 부여 등의 옛 영토까지 강토로 삼아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였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였다고 한다. 연호는 건흥(建興) |
11 |
대이진 |
830~858 |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손자로 왕권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인 신덕이 사망함으로 인하여, 동궁(東宮)으로 책봉되기 전에 '권지국무'라는 칭호로 즉위했다. 그는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10여 차례 조공(朝貢)하는 등 경제와 문화의 교류에 힘썼다. 연호를 함화(咸和). |
12 |
대건황 |
858~871 |
대이진(大彛震)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13 |
경왕 |
871~894 |
휘는 대현석(大玄錫), 대건황의 아들. 당(唐)나라 의종 때 세 차례 스스로 당나라에 들어가 국교를 강화하고,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어 교역을 넓혔다. |
14 |
대위해 |
894~906 |
연호와 시호, 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
15 |
애왕 |
906~926 |
휘는 대인선(大諲譔).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요)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925년 야율아보기가 친정(親征)을 감행하였다. 926년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
고려시대(高麗, 918~1392, 473년간, 총 34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877~943) |
918~943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
2 |
혜종 |
943~945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
3 |
정종(定宗, 923~949) |
945~949 |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
4 |
광종(光宗, 925~975) |
949~975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
5 |
경종(景宗, 955~981) |
975~981 |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
6 |
성종(成宗, 960~997) |
981~997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7 |
목종(穆宗, 980~1009) |
997~1009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현종(顯宗, 992~1031) |
1009~1031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
9 |
덕종(德宗, 1016~34) |
1031~1034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
10 |
정종(靖宗, 1018~46) |
1034~1046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11 |
문종(文宗, 1019~83) |
1046~1083 |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
12 |
순종(順宗, 1046~1083) |
1083 |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선종(宣宗, 1049~1094) |
1083~1094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헌종(獻宗, 1084~1097) |
1094~1095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15 |
숙종(肅宗, 1054~1105) |
1095~1105 |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예종(睿宗, 1079~1122) |
1105~1122 |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
17 |
인종(仁宗, 1109~1146) |
1122~1146 |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18 |
의종(毅宗, 1124~1173) |
1146~1170 |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명종(明宗, 1131~1202) |
1170~1197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20 |
신종(神宗, 1144~1204) |
1197~1204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21 |
희종(熙宗, 1181~1237) |
1204~1211 |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22 |
강종(康宗, 1152~1213) |
1211~1213 |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고종(高宗, 1192~1259) |
1213~1259 |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24 |
원종(元宗, 1219~1274) |
1259~1274 |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25 |
충렬왕(忠烈, 1236~1308) |
1274~1308 |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충선왕(忠宣, 1275~1325) |
1308~1313 |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27 |
충숙왕(忠肅, 1294~1339) |
1313~30, 32-39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
28 |
충혜왕(忠惠, 1315~1344) |
1330~32, 39-44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
29 |
충목왕(忠穆, 1337~1348) |
1344~1348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
30 |
충정왕(忠定, 1337~1352) |
1348~1351 |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
31 |
공민왕(恭愍, 1330~74) |
1351~1374 |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
32 |
우왕(禑, 1364~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창왕(昌, ?)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
34 |
공양왕(恭讓,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조선시대 건국.
대 |
왕 명 |
즉위년도 직위나이 |
재위기간 |
약 사 |
1 |
태조(太祖) |
1392~1398 57세~74세 |
6년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
1398~1400 41세~63세 |
2년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
1400~1418 33세~51세 |
18년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
1418~1450 21세~54세 |
32년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
1450~1452 36세~38세 |
2년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
1452~1455 12세~17세 |
3년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
1455~1468 39세~52세 |
13년 |
휘는 유.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오른 수양대군.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
8 |
예종(睿宗) |
1468~1469 19세~20세 |
1년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
1469~1494 12세~38세 |
25년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
1494~1506 19세~31세 |
12년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
1506~1544 19세~57세 |
38년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
1544~1545 30세~31세 |
1년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
1545~1567 12세~44세 |
22년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14 |
선조(宣祖) |
1567~1608 16세~59세 |
41년 |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
1608~1623 34세~67세 |
15년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
1623~1649 29세~55세 |
26년 |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
1649~1659 31세~41세 |
10년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
1659~1674 19세~34세 |
15년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
1674~1720 14세~60세 |
46년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
1720~1724 32세~37세 |
4년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
1724~1776 31세~83세 |
52년 |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
22 |
정조(正祖) |
1776~1800 25세~49세 |
24년 |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
1800~1834 12세~45세 |
34년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
24 |
헌종(憲宗) |
1834~1849 8세~23세 |
15년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
1849~1863 19세~33세 |
14년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
26 |
고종(高宗) 대한제국 1대 왕 |
1863~1907 12세~56세 |
44년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대한제국 2대 왕 |
1907~1910 33세~53세 |
3년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멸망) |
총 27대 519년
▶ 조(祖)와 종(宗)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왕에 조(祖)를 붙입니다...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하게 한 왕은 대개 종(宗)자로 부릅니다.
◈ 조(祖), 종(宗) : 임금. 조와 종이 붙는 임금의 이름은 임금이 죽은 후 부르는 이름으로 묘호(廟號)라고 함
◈ 대군(大君) : 정궁(正宮)이 낳은 아들.
◈ 군(君) : 후궁(後宮)이 낳은 아들.
◈ 공주(公主) : 정궁(正宮)이 낳은 딸.
◈ 옹주(翁主) : 후궁(後宮)이 낳은 딸.
◈ 대원군(大院君) : 임금의 아버지.
☞ 조(祖)와 종(宗)붙이는 방법은 정도전이 정한 것으로 태조실록에 '공(功)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1945 ~ )
代 |
대통령 |
재임기간 |
본관 |
약사 |
초대 |
이승만(李承晩, 1875~1965) |
1948. 7~1952. 8 |
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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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52. 8~1956. 8 |
|||
3 |
1956. 8~1960. 4 |
|||
과도내각 |
허정(許政, 1896~1988) |
1960. 4~1960. 8 |
김해 |
|
4 |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1960. 8~1963.12 |
해평 |
|
5 |
박정희(朴正熙, 1917~1979.10.26) |
1963.12~1967. 6 |
고령 |
|
6 |
1967. 7~1971. 6 |
|||
7 |
1971. 6~1972.12 |
|||
8 |
1972.12~1978.12 |
|||
9 |
1978.12~1979.10 |
|||
10 |
최규하(崔圭夏, 1919.7.16~2006.10.22) |
1979.12~1980. 8 |
강릉 |
|
11 |
전두환(全斗煥, 1931.1.18~) |
1980. 8~1981. 2 |
정선 |
|
12 |
1981. 2~1988. 2 |
|||
13 |
노태우(盧泰愚, 1932.12.4~) |
1988. 2~1993. 2 |
교하 |
|
14 |
김영삼(金泳三, 1927.12.20~) |
1993. 2~1998. 2 |
김녕 |
|
15 |
김대중(金大中, 1924.1.6~2009.8.18. 13:43) |
1998. 2~2003. 2 |
김해(가락) |
|
16 |
노무현(盧武鉉, 1946.8.6~2009,5.23) |
2003. 2~2008. 2 |
광주 |
17 |
이명박 (李明博 : 1941년12월19일 ~ 일본이름 - 쓰기야마 아키히로. |
2008.02~ |
일본 나고야 |
친일파 [월산] |
역대 국무총리.(1949.7.31~ 현재)
제 1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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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역대) |
성 명 |
년도(역대)-서리(임시) |
성 명 |
1대 (48.7.31~50.4.20)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1960년 초대 참의원,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건국훈장 대통령장, |
이범석 1900. 12. 1 서울~1972 |
서리 (50.4.21~50.11.22) 1950년 4~11월, 1949년3월 국방부장관,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국사건, 국방장관직에서 해임, 191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1913년 상하이로 가서 오송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항해과를 수료 |
신성모 1891(고종28) 경남 의령~1960 <당시 항해사 모습> |
2대 (50.11.23~52.4.23) 1951년,국무총리,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1948년 제헌국회의원,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 1949년 초대주미대사로 부임 |
장면 1899년8월28일 ~1966년6월4일 |
서리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 10월 교통부장관, 1950년 3월 사회부장관, 1951년 11월부터 국무총리 1952년 4월 국무총리 1957년 12월 서울특별시장 1959년 6월 사임, 1960년 4월 외무부장관, 1963년 민정이양과정, 대표최고위원,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 1980~88년 국정자문위원, 인촌문화상, |
허정 (50.11.6~52.4.9) 1896년 4월 8일 ~ 1989년 9월 18일 |
3대 (52.5.6~52.10.5) 1952년 제3대, 4대, 1960년 5대 국회의원 일제강점기에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교에 유학, 정치학을 전공, 1945년 8·15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시까지 초대 수도경찰청장, 이승만 정부 출범 초대 내각에서 외무부장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6·25전쟁중에는 이승만에 의해 국무총리, 제3·4·5대 민의원, 자유당 대표최고의원, |
장택상 호는 창랑(滄浪). 1893년 10월 22일 ~ 1969년 8월 1일 |
서리 (52.4.24~52.5.5) 평양숭실사범학교졸업, 봉천·운산보통학교교장, 감리교목사, 3·1 운동으로투옥, 조선민주당 부당수, 사회부장관, 1948년7월27일국무총리서리, 신흥대학장,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의장 |
이윤영(李允榮) 1890년8월19일 ~1975년10월15일 |
4대 (52.10.9~53.4.23) (1953~54년 국무총리)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의장 1934년 일본의 도쿄대학 [東京大學] 상과대학을 졸업, 조흥은행에 입사해 1945∼50년 이사, 1949년 외자청장· 한국식산은행장, 1950년 휘문의숙 이사, 1951년 재무부장관·기획처장 1953~54년 국무총리, 1967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담역, 1967~73년 제7·8대 국회의원 1970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 1971년 국회의장, 1971~84년 국토통일원 고문 1973~80년 유신정우회 의원 1973년 유신정우회 의장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상임고문, |
백두진(白斗鎭) 호는 소계(小溪) 1908. 10. 31 황해 신천~1993. 9. 5 서울 |
임시서리
1952년 국무총리 서리와 한미합동경제위원회 대표, |
백두진 |
5대-1954년 1912년 만주의 신흥학교를 졸업, 1917~45년 중앙고등보통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1945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1년 외무부장관, 제7~9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한국대표로 활동, 1962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
변영태 (卞榮泰) 호는 일석(逸石) 1892 서울~1969 |
||
제 2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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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 19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 1923년 미국 교포신문인 〈삼일신보〉 사장에 취임, 1933년 귀국해 이기붕과 함께 광산 일함, 1938년 흥업구락부 (興業俱樂部) 사건, 조선어학회사건, 8·15해방,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결성,집단지도체제, 8인 총무의 일원,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 10월 교통부장관, 1950년 3월 사회부장관, 1951년 11월부터 국무총리 서리, 1952년4월 국무총리 서리를 사임, 1957년 12월 서울특별시장, 1959년 6월 사임, 1960년 4월 외무부장관, 1963년 민정이양과정, 국민의 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 , 1980~88년,국정자문위원, 1988년 청조근정훈장, 인촌문화상, |
허정(許政) 호는 우양(友洋) 1896. 4. 8 부산 ~1988. 9. 18 서울 |
내각수반-1961년 신의주 동중학교를 졸업, 도요대학[東洋大學] 입학, 재학중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 8·15해방 후 귀국,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1956년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을 거쳐 5·16군사정변이전에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정치적 혼란, 1961년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 1962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 5월 형집행면제, 1969년 위스콘신대학교 교수, 1993년 현재 웨스턴미시간 대학교 교수로 재직, 태극무공훈장, 미국 은성훈장, |
장도영(張都暎) (1923 평북 용천~ )
|
7대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 1948년 맨해튼 가톨릭대학, 1949년 영국 포덤대학, 1957년 미국 시턴홀대학교 법학박사학위,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1927년천주교 평양교구 설정을 위한 재단사무, 메리놀외방전교회신부들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침,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1945년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1948년 제헌국회의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1949년 초대 주미대사, 1951년 제2대 국무총리, 취임 후 사임, 로마 교황청 훈장.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 1956년 부통령, 9월민주당전당대회에서저격 당했으나 경상에 그침,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제5대 민의원,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 1961년 5·16군사정변, 총리취임9개월만에 정계에서 물러남. 1966년 간염으로 사망, 국민장으로 거행, 경기도 포천의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 |
장면(張勉)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1899년8월28일 인천, ~1966년6월4일 |
내각수반 일본군 지원병 출신,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참모총장, 창군 당시 제5연대의 소·중대장, 제8연대의 대대장,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제주사태'를 진압, 지리산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을 토벌, 1950년 4월 헌병대 사령관, 9월 수도경비 사단장, 제8사단장, 제3군단장, 제1군사령관, 1959년 2월 육군 참모총장, 1960년 4·19혁명때 서울지역 계엄사령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7월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1962년6월 내각수반직을사임 1963년8월8일<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대통령출마를 반대하는 글을 써 구속, |
송요찬 (宋堯讚) 1918 충남 청양~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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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수반 (62.6.18~62.7.9) 제5·6·7·8·9대 대통령,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聞慶小學校)에서 3년간 교직, 일본인 시학관 (侍學官:지금의 장학사) 1942년 만주에있는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에 입학,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우수한성적으로 졸업 만주군 소위로 임관, 8·15해방이전까지주로관동군(關東軍)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 1963년 제2대민주공화당총재 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 |
박정희 (朴正熙) 호는 중수(中樹) 부친 - 박성빈(朴成彬) 모친 - 백남의(白南義) 5남 2녀의 막내 배우자 - 육영수 딸 - 박근혜, 박근령 아들 - 박지만 1917. 6. 15 경북 선산 ~1979. 10. 26 서울. |
15대 1961년한국은행 총재, 1962년 상공부장관, 1963년 경제기획원장관, 1982년 제15대 국무총리, 1989년에서 1993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롯데제과(주) 회장, 호남석유화학(주) 회장, 대신경제연구소 회장. |
유창순 (劉彰順) 1918년 8월 6일 ~ |
서리 |
유창순 |
16대 1937년 경복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감, 1940년 야마구치[山口] 고등학교, 1942년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 1946년 고려대학교 조교수가된후 부교수, 문리과대학 정경학부장, 1962년 문교부장관이 되어 교직을 떠남, 1963~70년 고려대 정경대학교수, 1967년 동아일보사이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1970~75년과 1977~82년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 1982~83년 국무총리, 1984년 국정자문위원, 1985~91년 한국적십자사 총재, |
김상협 (金相浹) 1920. 4. 20 전북 부안 ~1995. 2. 21 서울 |
서리 국민훈장 모란장, 저서로 〈기독교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교도민주주의〉· 〈모택동사상〉· 〈지성과 야성〉 |
김상협 |
17대 1943년 7월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1945년에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제17대 국무총리로 재임중인 1984년 11월, 집무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짐,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1985년 2월까지 약 3개월간 총리직을 대행,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 |
진의종 (陳懿鍾) 일본식 이름: 大原敏亨 1921년 12월 13일 전라북도 고창군 ~ 1995년 5월 11일
1971, 1973, 1981, 1985 국회의원, 1979 10ㆍ26이후 보사부 장관 |
권한대행 1970~80년대 한국경제의 격변기에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 1980년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2차례 역임, 제5공화국 시절 물가를 잡은 '안정론자'로 평가받았고 원칙주의에 철저했던 '시장경제론자', 일본 후쿠시마[福島] 경제전문학교를 졸업, 1943년 조선은행에 들어가 35세에 최연소 한국은행 조사부장. 1961년 주미 대사관 참사관, 1970~75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교체이사 및 고문을 역임, 미국 아메리칸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59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1975년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1978년 한국은행 총재 1980~82년과 1983~86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 |
신병현 1921. 2. 7 황해 장연 ~1999. 4. 5 미국 워싱턴,
1996년 이후 자녀들, 미국에 주로 체류, 미국에서 부인과 함께 인근 치과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귀가하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뇌출혈로 사망, 청조근정훈장, |
18대
|
노신영 |
서리 |
노신영 1930. 2. 28 평남 강서~ 현재. 행정관료·외교관·정치가 |
19대 항공부대 창설요인 7인 중 한 사람이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항공대 전투기부대의 전대장(戰隊長:일본군 항공대위)으로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활약. 1946년 5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귀국하여 미군정과 자주 접촉하면서 한국항공건설협회 간부와 항공계의 지도급 인사인 최용덕·이영무·장덕창·박범집·이근·김영환 등과 함께 항공부대창설의 주역. 1949년 항공사관학교 (지금의공군사관학교) 교장.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공군의 독립과장비의 현대화를 역설했다. 1949년 10월! 1952년 초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1953년 국제연합(UN) 한국군사사절단장. 1954~56년 공군참모총장, 1957년 중장. 1957~60년 국방장관, 1963년 제3공화국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에서 같은 해 주미대사로 파견. 1966년 한국반공연맹이사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전국구, 민주공화당),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경제계에도 관여. 1971~74년 삼성물산 사장, 1973년 경제동우회장, 대한상공회의 부회장 역임. 1975년 정우개발 회장1980~91년 국정자문회의 (대통령 직속기관. 대통령자문기관) 위원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역임. 1987년 6·29선언 이후 7·14개각-국무총리 |
김정렬 1917. 9. 29 서울~1992. 9. 7 경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남.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대한제국군인이었던 무관 집안. 1941년3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졸업.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광복 후 최용덕, 이근석 등과 함께 공군 창설에 앞장섰으며, 초대, 제3대 공군참모총장. 1957년 국방부 장관. 1960년 4.19 혁명으로 물러남.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 같은 해 주미 대사, 196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7년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자신이 곽영주의 훼방으로 소장진급이 어려워졌을 때 김정렬이 나서서 박정희를소장으로진급시켜준 은혜를 잊지못했던 박정희는 자신이 정권을 잡자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을 시켜준 것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요직을 두루 경험하게 해줬으며 이것이 전두환 정권인 5공화국까지 이어지게 했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후 1971년부터 삼성물산 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정우개발 회장 등을 역임. 실업계에서 활동.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종용하는 등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공직에 복귀하여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제5공화국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 |
서리 1943년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졸업. 195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69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1952∼80년 동 법대 교수, 법대 학장, 사법대학원장. 1970년 국제법학회장, 1972년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1974년 도쿄대학 객원교수. 1977년 학술원 회원. 1980년 감사원장, 1983년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 한일문화 교류기금 이사장, 경기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1987년 국무총리를 역임. 국민훈장 동백장, 청조근정훈장, 일훈일등욱일대수장(日勳一等旭日大綬章) 수상. 저서 <국제법학>· <아세아 정세변동과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영토> |
이한기 1917. 9. 5 전남 담양∼1995. 2. 2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廘兒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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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항공부대 창설요인 7인 중 한 사람이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항공대 전투기부대의 전대장(戰隊長:일본군 항공대위)으로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활약. 1946년 5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귀국하여 미군정과 자주 접촉하면서 한국항공건설협회 간부와 항공계의 지도급 인사인 최용덕·이영무·장덕창·박범집·이근·김영환 등과 함께 항공부대창설의 주역. 1949년 항공사관학교 (지금의공군사관학교) 교장. <항공의 경종>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공군의 독립과장비의 현대화를 역설했다. 1949년 10월! 1952년 초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1953년 국제연합(UN) 한국군사사절단장. 1954~56년 공군참모총장, 1957년 중장. 1957~60년 국방장관, 1963년 제3공화국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에서 같은 해 주미대사로 파견. 1966년 한국반공연맹이사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전국구, 민주공화당),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경제계에도 관여. 1971~74년 삼성물산 사장, 1973년 경제동우회장, 대한상공회의 부회장 역임. 1975년 정우개발 회장1980~91년 국정자문회의 (대통령 직속기관. 대통령자문기관) 위원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역임. 1987년 6·29선언 이후 7·14개각-국무총리 |
김정렬 1917. 9. 29 서울~1992. 9. 7
경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남.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대한제국군인이었던 무관 집안. 1941년3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졸업.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광복 후 최용덕, 이근석 등과 함께 공군 창설에 앞장섰으며, 초대, 제3대 공군참모총장. 1957년 국방부 장관. 1960년 4.19 혁명으로 물러남.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 같은 해 주미 대사, 196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7년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자신이 곽영주의 훼방으로 소장진급이 어려워졌을 때 김정렬이 나서서 박정희를소장으로진급시켜준 은혜를 잊지못했던 박정희는 자신이 정권을 잡자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을 시켜준 것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요직을 두루 경험하게 해줬으며 이것이 전두환 정권인 5공화국까지 이어지게 했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후 1971년부터 삼성물산 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정우개발 회장 등을 역임. 실업계에서 활동.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종용하는 등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공직에 복귀하여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제5공화국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 |
노태우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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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195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1969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박사학위. 1961년 서울대학교 교수, 1969~71년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1971~72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객원교수, 1975~79년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장, 1979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1980~83년 서울대학교 부총장, 1983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1983~85년 서울대학교 총장, 1988년 국무총리 1992년 현재 학술원 회원. (경제학 분야), 대통령 교육 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저서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구조변동> <자본시장과 주식분산> <재정경제학〉· 〈한국 경제론〉 |
이현재 1929. 12. 20 충남 홍성~. |
서리 |
이현재 |
21대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임관. 군복무를 시작.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 육군중장 예편, 미국으로 건너감. 1970년경 정치학박사학위. 1978년초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부. 1981년 1월 13일 첫 해외 근무 주(駐)영국대사관 및 주(駐)아일랜드대사관 신임장을 받고 발탁. .( ~ 1984년) 이후, 주로마교황청대사관 대사 (1985년 ~ 1987년) 역임. 그후 13대 국회의원(1988년 5월 ~ 12월)정치 활동을 시작. (1988년 12월 ~ 1990년 12월) 국무총리 1999년 제3회 유한재단 유일한상 2002년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고문.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2004년 한국외국어대 총동문회 특별공로상, |
강영훈 (姜英勳, 1922년 5월 30일 ~ ) 평안북도 창성 출생 |
서리 |
강영훈 |
22대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 졸업,
1958년
미국 브리검영대학교수학.
1966년
미국 암스트롱
주립대학교 조교수.
1967년
뉴욕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
1967년
서울대학교 강사.
전임강사·조교수·
부교수.
1981년
외교과 교수.
1978, 1985년
서울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1988년
대통령 정치보좌역
정치계에 입문.
1990년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1992년
민주자유당
전국구의원.
2002년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
제14대 국회 진출.
저서
<시민민주주의>
<한국민족주의>
<유토피아 Utopia>·
<구주외교사> |
노재봉 1936. 2. 8 경남 마산~. |
서리 |
노재봉 |
23대 1991년 청조근정훈장 1993년 국민훈장무궁화장 1995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97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
정원식 1928년 8월 5일 ~ |
서리 |
정원식 |
33대
경기도 포천 출신.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졸업, 1958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재직. 1976년 근정포장 1980년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정의당 소속 제11, 12, 13대 국회의원당선. 민주정의당의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거쳐 1988년 내무부 장관 3당 합당 이후에도 김영삼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 제14, 15대 국회의원에 당선. 1989년 청조근정훈장 1995년 제14대 국회부의장.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 이회창, 이인제에 이어 3위. 그 후 한나라당 부총재, 총재권한대행.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 입당,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 자유민주연합 총재, 제33대 국무총리 2002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 하나로국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만들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낙선. 2007년 한나라당에 재입당. 이명박을 지지. |
이한동(李漢東) (1934년12월5일경기포천시 ~ ) 법무법인 남명 대표변호사 서울대학교 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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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 1958년 이화여대수학과에진학했지만 졸업 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편입.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과 프린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7년 미국에서 돌아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부임. 사회활동, 특히 그리스도교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부회장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실행위원. 세계YWCA 실행위원. 세계개혁교회연맹 협력과 증언위원회 위원장. 1988년 한국기독교장로회목사 안수 1996년 이화여자대학교의 대학총장 이화여자대학교의신임총장이 '결혼한 여자'라는 사실이 한국에서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설립 이래 설립자를 제외한 역대 교장 10명이 모두 미혼 여성이었으며, 따라서 총장이 미혼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화여대의 불문율이었기 때문. 2005년 청조근정훈장 2006년 민주당 대표 2006년6월~2007년4월까지 새천년민주당의 대표. 대한민국의 정치인. (처음에는 한화갑과 공동대표이후 단독 대표. 2007년 4월 3일 박상천에게 경선에서 패해 물러났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2002년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로 지명. 아들의 미국 국적 취득 문제, 부동산투기및 위장전입 문제, 학력 허위 표기 문제 등의 문제가 불거져 국회에서 인준동의안이 부결됨에 따라 총리 서리에 그쳤다. 장상 총리 인준동의안 부결시 투표에 참가한 국회의원은 모두 244명(한나라당 125명, 새천년민주당 105명, 자유민주연합 9명, 무소속 5명 참가)이었으며, 투표 결과는 찬성 100표 반대 142표 무효 1표 기권 1표. 국회에서 이같이 총리 인준이 부결된 것은 헌정 사상 7번째. 60년 김도현 총리 서리 인준 부결 이후 42년만의 일. 2008년 민주당 상임고문. |
장상(張裳) (1939년10월 3일 평북 용천 -)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저서 〈바울의 역사의식과 복음〉 〈여성학이신학에 미친영향 : 여성신학의 기원과 발전〉 논문도 발표. |
34대 1932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남. 배재고와 연세대 법대를 나온 뒤 고시 10회에 합격. 1963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용. 서울지법 남부지원장. 부산지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1980년 강제 해직기자 해고 무효 △골재채취 금지구역 외에도 불허 가능 △서울대총장실 난입 학생 제명처분 취소 등의 판결을 내놓는 등 대체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면모를 보인 것으로 평가. 1991년 대법관 1996년 한해동안의 노동 관련 소송에서 노동자쪽 승소 판결을 많이 내린 대법관 순위를 매겼을 때 12명 중 4위를 차지. 세정·경제 분야 사건에서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보수 법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 1997년 대법관 퇴임. 청조근정훈장 법복을 벗을 때까지 중앙선관위원장과 대법원 법관인사위원장직을 역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동아일보사가 국가와 한국방송공사(KBS)를 상대로 낸 동아방송 양도 무효 확인소송 등 굵직한 사건의 변호인. 1999년 삼성전자 사외이사. 삼성차 부실 인수문제로 시끄러울 때 열린 이사회에서 “정부가 재무구조개선 약정 위반. (삼성그룹) 계열사에 책임을 묻는 것(삼성차 부실을 떠안으라고 하는 것)은 부당. 9월 삼성전자 이사회 회의록에 기록. 2000년 삼성전자 주식 500주를 보유. 참여연대는 사외이사들이 공로주 형식으로 회사 주식을 받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 2003년 변호사김석수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신문윤리위원장과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2007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
김석수(金碩洙) (1932년11월20일 경남하동군 -) 연세대학교 법학과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
서리 입사후 2년만에 기획실장 1988년 대표이사 취임. 매일경제신문와 매일경제TV 대표이사회장 제37회 한국신문협회 회장. 1992년 세계경제포럼으로부터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 1996년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 국가 컨설팅' 사업. 세계지식포럼의 집행위원장. 2000년 선.후진국간 지식격차 해소를 위한 `세계지식포럼'을 창설. 한국판 `다보스포럼' 2002년 김대중 대통령 국무총리 서리임명 세금 탈루등의 여러 의혹으로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함, 매일경제신문의 창업주 정진기의 사위. 박정희 정권 때 공군참모총장 장지량의 아들. “[張大煥서리 임명 50세 總理… 평균59세 長官들] |
장대환(張大煥) (1952년 3월 21일 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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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1932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남. 배재고와 연세대 법대를 나온 뒤 고시 10회에 합격. 1963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용. 서울지법 남부지원장. 부산지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1980년 강제 해직기자 해고 무효 △골재채취 금지구역 외에도 불허 가능 △서울대총장실 난입 학생 제명처분 취소 등의 판결을 내놓는 등 대체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면모를 보인 것으로 평가. 1991년 대법관 1996년 한해동안의 노동 관련 소송에서 노동자쪽 승소 판결을 많이 내린 대법관 순위를 매겼을 때 12명 중 4위를 차지. 세정·경제 분야 사건에서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보수 법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 1997년 대법관 퇴임. 청조근정훈장 법복을 벗을 때까지 중앙선관위원장과 대법원 법관인사위원장직을 역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동아일보사가 국가와 한국방송공사(KBS)를 상대로 낸 동아방송 양도 무효 확인소송 등 굵직한 사건의 변호인. 1999년 삼성전자 사외이사. 삼성차 부실 인수문제로 시끄러울 때 열린 이사회에서 “정부가 재무구조개선 약정 위반. (삼성그룹) 계열사에 책임을 묻는 것(삼성차 부실을 떠안으라고 하는 것)은 부당. 9월 삼성전자 이사회 회의록에 기록. 2000년 삼성전자 주식 500주를 보유. 참여연대는 사외이사들이 공로주 형식으로 회사 주식을 받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 2003년 변호사김석수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신문윤리위원장과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 2007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
김석수(金碩洙) (1932년11월20일 경남하동군 -) 연세대학교 법학과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
노무현 정부 (참여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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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행정과 합격 1973년 강원도 부지사, 1975년 전라남도지사. 1979년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교통부 장관과 농수산부 장관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 1987년 내무부 장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시 관선 시장. 명지대학교 총장.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공천 서울시장선거당선4년간시정.. 2002년 몽골 북극성훈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193대 2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그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 그리고 특히 4.15총선의 공정한 관리라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5월 24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남, 이후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 2006년 희망한국 국민연대 발기인 2007년 1월 16일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발표. 소피아대학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 2008년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
고건(高建) (1938년 1월 2일 ~ ) 시라큐스 대학교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한국철학회 회장을 지냄. 고형곤 (高亨坤, 1906년~2004년) 장남 고진은 바로비전 대표이사 6개월의 석사장교로 복무 논란. 차남 고휘와 고위역시 신경성 질환으로 면제 판정을 받고 고위는 단기사병으로 18개월간 복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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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1971년 서울 용산고 졸업,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 입학.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입학.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 (~1975년) 1978년 돌베개출판사 대표. 1979년 광장서적 대표. 1980년 서울대복학생협의회 대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 (~1982년) 1983년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발기인, 정책실 차장. 1985년 민통련 정책실 차장, 총무국장, 부대변인.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 1988년 서울 관악구에서 평민당 후보입후보 당선된 이후 연속 5회 국회의원에 당선. 민주평화통일연구회 상임이사,연구소장. 평화민주당 소속, 제13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을) 평민당 원내부총무. 1991년 신민주연합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1992년 민주당 소속,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을) 민주당 당무기획실장. 1993년 민주당 환경특위 위원장. 1995년 서울시 정무부시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을).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 의장. 국회 한국아동환경인구연맹(CPE) 부회장. (~ 2000년) 황조근정훈장.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회 부의장.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교육부 장관 재임. 교육개혁은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에 기반한정책.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때 노무현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이 사임 후, 국무총리로 임명. 국무총리 재직 당시, 19년간 미결 과제로남아있던 원전폐기물처리장 설치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였고,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추진. 3.1절골프 파문으로 인해 총리직을 사퇴.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제16대 국회의원(서울 관악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 의장.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 의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서울시지부장.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 2003년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을) 열린우리당 창당기획단장. 청조근정훈장. 2004년 열린우리당 외부인사영입 추진위원장. 열린우리당 소속,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을) 국무총리. ( ~2006년 3월) 2007년6월 1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선거출마할 것을 선언. 대통합민주신당의 당내 경선에서 정동영, 손학규에 이어 3위.. 2008년 제3대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 |
이해찬(李海瓚) (1952년 7월 10일 충남 청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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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4살 때 한국전쟁. 부모를 따라 월남. 1957년 서울영등포초등학교 졸업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라톤 선수로도 활약. 릴레이 선수로 뽑힘. 1960년 정신여자중학교 졸업. 1963년 정신여자고등학교 졸업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재학중, 남편 박성준을 만나 1967년결혼, 6개월만에 박성준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1977년 한국신학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 1981년 석방, 13년간 남편을 옥바라지, 졸업 후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기숙사 사감을 그만둠.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겨 한국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 여성운동 초창기 소외계층 여성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1974년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 운동에 여성분과의 간사. 1977년 한국신학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를 취득. 1979년 체제 비판적인 이념서적을 학습·유포한 혐의로 이우재, 신인령 등 아카데미의 동료 간사들과 함께 구속. 광주교도소 수감. 2년 6개월간의 투옥, 1981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 13년째 수감중이던 남편의 석방 운동을 하다가 결국 같은 해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에 특별사면,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여성학 석사를 취득, 10월 28일 아들 '박한 길' 출생.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사.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성심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사로 활동,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결성, 6월 민주 항쟁에서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전경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줌.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의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가족법 개정 특별위원회 위원장, 1990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부회장, 공동대표, 지도위원등으로 활동, 1994년 남편과 일본으로 건너가 오차노미즈 여자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중, 1997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이동하며 중단, 1999년 2월, 미국에 체류, 참여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 9월 이재정 당시 성공회대 총장과 김대중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 창당 작업에 여성 분과위원장으로 참여, 정계 입문, 참여연대의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참여연대 공동대표직에서 사퇴,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제5번)로서 제16대 국회의원에 선출, 환경노동위원회 활동, 미군 송유관, 비정규직, 공단들의 국립공원 훼손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 2000년 국정감사에서 환경부에게 "새만금간척지는 2011년 완공때까지 7억여원이 더 드는 사업인데 경제 수익이 보장되지도않는 상황에서 그동안 들인 1조여원이 아깝다며 건설을 강행하는 게말이 되느냐"며 새만금 사업의 경제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노사정위원회에게 주 5일제와 더불어 주 5일 수업제와 여가시설 확충을 함께 정비할 것을 요구, 경기도의 남한강 정비사업의 의도,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취업시킨 장애인들의 높은 퇴직율, 반월시화공단의 높은 다이옥신 농도, 급증한 미성년자 불법고용, 산업재해지정병원들의 산재환자 진료비 과다청구, 공공기관의 국립공원 훼손 등을 지적, 뉴스메이커, 문화일보, 국감연대 등이 각각 선정한 국정감사 베스트 의원으로 선정, 법률연맹 국감모니터단은 국감우수 의원으로 선정, 2001년 초대 여성부장관에 취임, 의원직 사퇴. 박양수에게 의원직을 승계, 모성보호법 통과, 2000년 10월, 출산휴가를 90일로 확대, 생리휴가, 유.사산 휴가, 태아검진 휴가를 신설, 육아 휴직 급여 도입,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에 대한 개정안 (약칭 모성보호법)을 발의, 2001년 4월 24일 국회에서 원내총무ㆍ정책위의장 연석회의를 갖고 시행을 2년 유예하는 조건으로 국회 통과를 합의, 2001년 11월 1일부터 시행하는 안을 5월 10일에 합의, 법안은 국회에서 7월 18일에 통과, 노동부는 2003년 30만원, 2004년 40만원으로 육아 휴직 급여를 인상,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오히려 기업의 여성 고용 기피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반대, 남녀차별개선위원회를 통해 성희롱에 대한 인식, 호주제 폐지, 2003년 2월 28일 참여 정부의 초대 내각 여성부 장관, 2004년 2월 15일 17대 총선에 출마, 환경부 장관을 사직, 열린우리당에 입당, 3월 4일 경기도 일산갑 선거구에 공천,17대 국회의원 당선.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 동의안 표결 때도 찬성, 2005년 5월 국회 표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쌀 협상 비준안의 국회 표결 때에는 당론에 따라 찬성,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 신행정수도 건설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가정법원에서는 가사. 소년제도개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 2006년 3월 24일 37대 국무총리. 10월 9일 핵실험을 강행하자 한총리는 “포용정책이 핵실험을 막는 데 실패했다고 자인한다”며 “전반적인 포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왔다”라고 하였다. 2007년 3월 7일 총리 퇴임. 열린우리당 입당. 2009년 5월 23일 국민장 공동 장의위원장, |
한명숙(韓明淑) ( 1944년 3월 24일 평남 평양~)
1967년 박성준과 결혼해 1985년 태어난 1남 박한 길을 두고 있다. 박성준은 성공회대학교 NGO 평화학 교수로, 현재 서울 통인동의 길담서원을 운영, 국회여성정책포럼 고문 대한태권도연맹 고문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위원. 가칭)민주화운동공제회 설립 발기인,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아줌마가 키우는 연대 자문위원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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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2003년 제1회 암참어워드 2006년3월 15일 이해찬 총리의 사퇴로 2006년 4월 19일까지 국무총리의 권한대행, 2007년4월3일~ 2008년2월28일 제38대 국무총리를 역임. 칠레 대십자 훈장 2009년, 이명박 정부의 주미대사로 내정. |
한덕수(韓悳洙) (1949년6월18일 전북 전주~ )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제8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하버드대학교대학원 경제학 박사 제5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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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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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 조카 사위, 1955년 춘천고등학교 졸업 1960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3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1965년~1968년 영국 요크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968년 영국 요크대학교 경제학박사 1968년~1970년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임매뉴엘대학 응용경제학과 연구교수 1971년~1988년 서울대학교교수(경제학) 1975년~1988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980년 신군부 입법위원 1985년 8월부터 1986년 8월 1년간은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1987년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 1988년 제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춘천, 민주정의당) 상공부 장관 (~1990년) 1993년 4월 - 1994년 12월 주미국대사 1994년 대통령 비서실장 (~1995년) 1996년~2000년 2월 제15대 국회의원 (춘천 갑, 신한국당-한나라당- 민주국민당) 1996년 8월 - 1997년 3월 제3대 재정경제원장관 겸 부총리 1997년 영국요크대학교 명예대학박사 1998년 강원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한나라당 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춘천, 민주국민당-무소속- 한나라당) 2001년~2002년 제56차 유엔 총회에서 의장. 외교통상부 장관 2002년 연세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2002년 11월 ~ 2002년 12월 이회창대통령 후보 외교담당 특별자문역 2004년 명예 KBE작위(honorary KBE). 춘천 문화재단 이사장,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 영국 왕실 대영제국 명예기사 2005년 2014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2006년 ~ 2008년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물포럼 총재 2007년 유엔사무총장 기후변화 특사 유엔사무총장 물과위생자문위원 2007년~2008년 유엔물과재해고위급 전문가회의 의장 2007년 제7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국위선양부문상 2008년2월 29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 임명 OECD 각료이사회 의장 2009년5월 23일 ~ 5월 29일 故노무현 대통령 공동 장의 위원장 |
한승수(韓昇洙) (1936년12월28일, 강원 춘천~) 요크대학교 대학원
처 - 홍소자(洪昭子), (1939년 10월 7일~) 전(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육인순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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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한국은행 출신으로 중앙은행 독립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사,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충청권 유력 후보로 이따금 거론되었지만, 지지율 답보로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미국유학 시절에 야구를 즐겨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이후 교통방송의 프로 야구개막전 라디오 중계 방송에 객원 해설자 2009년 헌법재판소자문위원회 위원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 원장 41대 국무총리. <2009년 9월 29일~ 2010년 8월 11일> |
정운찬(鄭雲燦) (1948년2월29일, 충남 공주시~)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4대강 총리로 지명되면서 그동안의 소신을 일순간에 바꿔 논란이 되고 있다. 총리 임명 전에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전반에 관하여 부정적인 발언을 하였다. 특히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가시적 성과만 집착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지명 후에는 4대강 사업이 필요성 있는 사업이라고 말하는 등 기존의 소신을 바꿔 논란을 야기하였다. 세종시 청문회에서 정운찬은 "국토의 균형 발전이란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세종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족 기능 강화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은 이미 집행 중인 세종시 건설을 축소하려는 의도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병역기피 의혹 야당 의원들이 1977년 고령(31세)을 사유로 소집을 면제받은 데 대해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했다. 정운찬은 대학 1학년이던 지난 1966년 보충역 판정을 받았으나 1968년 부선망 독자'(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아들)라는 이유로 한 차례 징병검사를 연기했고, 1970년에 재검을 받아 이듬해 재차 보충역으로 판정받았었다. 인사청문특위 민주당 간사인 백원우 의원은 정 후보자가 1977년 병역을 면제받기 이전인 1970년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에 제출한 입학허가신청서에 `병역을 면제(exempted)받았다'고 기재했다고 주장하면서 "병역면제가 안됐는데 면제됐다고 하는 것은 서류 조작으로 해외유학을 통해 면제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고 공격했다. "지금 나와있는 의혹 수준만해도 과거엔 절대로 총리 지명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
위장전입 정운찬의 부인이 1988년 2월 주소지를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마명리로 옮겼다가 같은해 4월 다시 원래 주소인 서울 방배동으로 이전한 것은 위장전입이라는 게 야권의 의혹이나 앞서 정 후보자는 "포천에 땅이나 집을 산 적은 없고 한때 전원생활을 하려고 주소지를 잠깐 옮겼다가 포기한 것"이라는 취지로 해명했었다. 백원우 의원은 "두달간에 불과하지만 위장전입은 분명히 있었다"며 "이것은 시인하고 사과해야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공무원법상 겸직 금지 위반 민주당 최재성의원은 21일 국회에서 실시된 인사청문회에서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가) 급여 명목의 돈을 받으면서 해당 행위에 대해 소속 기관장인 이장무 서울대 총장으로부터 겸직에 대한 허가를 공식적으로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현행 국가공무원법 제64조는 “공무원은 공무 외에 영리를 목적으로하는업무에종사하지 못하며 소속 기관장의 허가 없이 다른 직무를 겸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은 ‘ 계속적으로 재산상의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업무’를 영리업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앞서 정운찬은 지난18일 국회에 제출한 서면질의 답변서에서 예스24 고문 활동에 대해 “학자로서 좋은 책을 널리 보급하는 일은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생각했고 ‘고문’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자문에 응하는 자리로만 생각해 직을 수락했다”며 “당시 대학 사무국에 질의했는데 ‘승인 받을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1년 9개월 만에 1억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는 것이 된다. 예스24 고문 활동 외에 다른 기업체에서는 활동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속속 다른 기업체에서활동했다는증거가 발견되었다.하나금융연구소 고문직을 겸직하며 연봉1억원을 받았으며, 2007년부터 2년 동안 일본의 정보통신 분야 대기업인 시에스케이(CSK)그룹의 연구기관인 지속성장연구소(CSK-IS) 이사로 재직했다. 한편 서울대 교무처 관계자는 “보통 교수들이 사외이사를 할경우 겸직허가 신청을 내고 총장 허가를 받는데 정운찬 총리는 2007년과 2008년 겸직허가 신청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41대 임기 : <2010년 10월 1일~> 1991년 2월 ~ 1993년 2월: 법원 행정처 법정국 국장, 1996년 2월 ~ 1997년 2월: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1997년 2월 ~ 2000년 2월: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 2000년 2월 ~ 2004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실장, 2000년 2월 ~ 2003년 9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4년 광주지방법원 법원장, 2005년 2월 ~ 2005년 11월: 법원 행정처 차장, 2005년 ~ 2008년 대법원 대법관, 2008년 9월 8일 ~ 2010년 9월 30일: 제21대 감사원장, 2009년 10월 아시아감사원장회의 사무총장, 2010년 10월 1일 ~ 제41대 국무총리 |
김황식( 金滉植, (1948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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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졸업,사법시험 합격 후 여러곳에서 판사로 재직했으며, 2000년 ~ 2003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4년 광주지방법원법원장, 2004년 ~ 2005년 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2005년 ~ 2008년 대법관으로 재직 중 2008년 9월 제21대 감사원장으로 임명. 2010년 9월까지 역임, 2010년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의 자진사퇴 후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다 9월 16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 국회 임명동의을 위한 인사청문회는 9월 29일 열렸으며, 10월 1일, 임명 동의안이 가결되고 총리 임명장이 수여되었다. 최초의 전라남도 출신 국무총리이며, 감사원장 출신자로서는 이회창 다음으로 두 번째가 된다. 전라남도 출신으로는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가 국무총리로 임명된 적 있으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한바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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