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신라 향가집 삼대목에 얽힌 이야기 !!!

arang 2519 2014. 11. 22. 12:53

금일은 2014년 11월 22일 토요일의 즐거운 토요 휴무일로 좋은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일도 필자는 01:10경 기상하여 몇년전 구입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이 기록하신 삼국유사를 구독하고자 책장을 넘기다가 지난 1985년 간행된 삼성출판사의 조흔파 저술의 '소설 한국사' 제3권을 구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서적에 지난 시절 필자가 학습하였던 내용 중에 몰랐던 내용으로 모든 약초나라 카페 회원 여러분들도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기록합니다.

필자는 지난 어린 시절에 학습을 통하여 신라는 박, 석, 김 3성이 왕위에 올랏으며, 그 왕의 명명도 몇차례 걸쳐서 바뀌었는데 그 과정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관, 왕 등으로 학습하였습니다.

또한 필자는 어린 시절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한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학습하였습니다.

지난 신라 시대의 이야기로 정강왕은 후손도 없이 즉위한 지 알마 지나지 않아 병석에 누워 임종 직전에 자신의 누이동생 만 공주를 왕으로 축대하여 잘 섬기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이 유언에 따라 신라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3번째 여왕으로 제 51대 진성여왕으로 추대된 만 공주는 지난 시절 위홍의 부인으로 부호 부인을 대궐로 불러들여서 만 공주의 유모이었으니 위홍으로서는 자신이 여왕의 유모부가 되는 것이었으니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더 황당하고 놀라운 사실은 만 공주가 어린 시절부터 유모인 부호 부인의 자택, 즉 위홍의 자택에 유모인 부호 부인을 상면한다는 핑계로 자주 출입을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 시절 재상이엇던 위홍으로부터 시문을 학습한다는 핑계로 위홍의 거실에도 출입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밤에 나이 어린 만 공주는 늙은 대신 위홍으로부터 남성의 위력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 공주는 그러한 행동이 불의의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몰래 되풀이는 되는 그러한 음양의 조화에 대하여 재미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위홍은 이글거리며 타는듯한 만 공주의 눈빛과 상면시마다 항상 반쯤 열려진 상태로 젖어있는 입술은 물론이고 하얀 목덜미의 소유자인 어린 만 공주를 목격하면 위홍의 능수능란한 기교로 만 공주의 여체를 흡족하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만 공주와의 부호 부인과의 유모관계는 물론이고 위홍과의 관계는 더욱 더 깊은 뜨거운 관계로 발전하였으니 위홍으로서는 진성여왕의 알려지지 않는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 공주와의 위홍 부부간의 관계로 인하여 위홍은 최선을 다하여 만 공주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진성여왕으로 즉위한 만 공주는 지존의 자리에 등극하여 아무리 유모의 집이고 또한 자신의 정부의 집인 위홍의 자택을 거동할 수 없어서 위홍을 대궐로 자주 불러서 자신의 음욕을 해결하였으나 이에 불만족한 진성여왕은 주변의 이목이 두려워 구실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하게; 알려진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은 그 시절 유행하는 향가를 책으로 편찬하라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그 향가집은 대부분 대구화상이 집필하였고 위홍은 거의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에는 알려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위홍은 향가집 편찬을 위하여, 즉 진성여왕의 음욕을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러한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은 위홍과 대구화상의 공동 작품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위홍은 오늘날 한반도의 일부 고위층 및 교수들의 논문 표절행위와 비슷한 제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확신을 하는 상태입니다.

아무튼 '삼대목'이라는 향가집 편찬은 진성여왕의 음욕 해결을 위하여 위홍을 대궐로 불러들이려는 역할을 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모이었던 위홍의 부인으로 부호 부인은 물론이고 진성여왕의 정부인 위홍으로 그 부부는 세도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부호 부인은 진성여왕과 자신의 남편 위홍과의 관계를 짐작하였으나 남편 위홍의 위세를 팔아서 호의호식하는 관계로 만족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위홍 일파의 세도 행태에 대하여 진저리가 났지만 그 누구도 제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잔학 무도한 세도가이었던 진성여왕 음욕의 해결사 위홍도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여행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진성여왕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진성여왕의 음욕 해결사 위홍이 금작스럽게 사망하자 진성여왕 자신이 첫정을 바치고 또한 자신을 진정한 여성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였던 위홍을 위하여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홍을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의 음욕의 해결사이자 정부이었던 위홍이 사망하자 그 외로움은 진성여왕에게 있어서 매일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달밝은 고요한 밤이면 쓸쓸한 잠자리가 너무나도 외로워 미칠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난 시절의 음욕의 해결사 위홍의 기교가 간절하게 생각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성여왕은 지난 시절의 위홍을 잊고자 젊고 튼튼한 화랑 출신 남성을 3~4명을 궁궐로 불러들여 국사를 논의한다는 미영하에 음란한 자신의 여체를 해결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새로운 불장난이 시작되었던것으로 지구상의 모든 위정자들이 본받아야 할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젊은 화랑들의 기교는 지난 시절 늙은 위홍의 기교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것으로 진성여왕은 자신의 여체와 난행의 상대인 젊은 그들에게 벼슬을 맡기고 국정을 운영하였으니 이를 알게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가고 있었습니다.

신성하여야 하는 조정에는 각종 간신배들의 합숙소이었고 엄전해야 하는 여왕의 침전에는 음란과 방탕의 장소가 되었으니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져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전국 곳곳에서는 도둑이 들끓고 민란이 발생하고 온갖 벽서가 부착되어 민심이 동요되었으니 진성여왕이 도둑을 잡으라고 명령하면 군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서 도둑을 잡기는 커녕 도둑과 함세하는 지경에 이르럿으니 더 이상 뾰쪽한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민심의 이반은 신라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곁들여서 신라 혼인 풍습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시절에 신라에서는 골품제도 기반위에 족내혼이 성행하였으며, 또한 방탕한 왕들의 생활로 왕권 다툼이 너무 처참하고 빈번하게 발생하여 국력을 상실한 결과로 추측됩니다.

금일도 이른 아침부터 두서없는 장문의 글로 여러 약초나라 카페 회원 여러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면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그럼 금일도 약초나라 카페 회원 여러분들의 가정에 즐겁고 행복이 가늑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출처 : 약초나라 (yakchonara)
글쓴이 : 선착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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